임지윤 작가 에세이

  • 등록 2024.10.07 12: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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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채우는 높이 


‘오늘은 어떤 커피를 마실까?’

 

출근길, 잠시 고민해 본다. 커피 생각을 하며 버스 안에서 바라본 초록색 가로수의 잎에 아직도 여름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틀렸음을 느끼게 된다. 얼굴을 스치며 흐르는 시원한 공기,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눈에 담기고, 피부로 느껴지는 자연은 가을이 왔음을 알려준다.

 

출근길 고민은 코스타리카 아끼아레스 지역 1,200m에서 재배된 커피를 마시며 끝이 난다. 체리와 같은 산미, 캐러멜의 단맛이 입안으로 퍼지는 사이, 내일의 휴일을 기다리는 마음과 함께 반복되는 수업과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

 

개천절, 모처럼의 휴일에 이불속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생각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파란 하늘에 찰나의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등산복을 입고 등산화를 챙겨 신고 청계산의 가을 속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산에 도착하고 나에게 가장 먼저 한 말.

“힘들다고 중간에 내려오지 말고 정상까지 꼭 올라가자!”라는 스스로의 다짐이었다. 다부진 결심을 하니 산에 오르는 발걸음이 서서히 빨라진다. 의욕만큼이나 빨라진 걸음으로 걷다가 문득 발바닥에 닿는 땅의 감촉이 폭신하게 느껴진다. 속도를 낮추고 부드럽고 폭신한 가을의 땅을 느끼며 들려오는 새소리에 그 발걸음조차 멈추고 눈을 감아본다.

 

자연이 주는 감각과 소리에 집중하니 정상이라는 목표가 사라진다.

지금 나의 눈에 보이고, 피부에 닿고 귀에 들리는 가을을 더 잘 느끼고 싶은 마음만 남는다.

산을 오르며 보이는 나무들, 나뭇잎 위로 반짝이는 햇빛, 폭신한 땅의 감촉, 구름도 없이 파랗기만 한 하늘.

가파른 산길을 오르며 중간중간 호흡을 가다듬고, 그렇게 가을을 눈에 담고 느끼면서 가을 속을 걷다 보니 매봉에 도착했다.

매봉 582m. 피식 웃음이 난다.

가을을 느끼며 도착한 만족감도 있었지만, 커피나무가 자라는 곳의 높이를 생각하니 힘겹게 오른 높이가 고작 582m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커피나무는 어느 정도의 고도에서 자랄까?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인 아라비카 품종은 해발 800m~2000m의 고산지대 및 고지대에서 생육이 가능하고 콩고가 원산지인 로부스타는 해발 700m 이하의 저지대나 평지에서 자란다.

 

[위키피디아]

오를 수 있는 높이로만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나는 쓴맛이 묵직한 로부스타만 가능할 것이다.

체리와 캐러멜이 느껴졌던 코스타리카 커피는 오늘 오른 거리의 2배, 향긋한 꽃 향과 단맛이 좋은 에티오피아의 커피를 마시려면 지금 오른 높이에서 적어도 3배인 1500m는 올라가야 아라비카 커피나무와 산미와 향미가 좋은 커피 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매봉에서 숨을 고르고, 나무들을 보니 마음이 가득해진다.

가을 속을 걸으며 보았던 자연과 내 피부에 닿았던 감촉, 커피나무가 자라지 않는 나라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향미가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 그리고 산에 오르기 전 나 자신과 했던 지켜진 다짐으로 말이다.

 

‘정상’만 생각했다면 마음이 가득해졌을까?

청계산의 나무를 보며 커피나무가 생각났을까?

 

삶을 살다 보면 마음속은 많은 다짐들과 목표로 채워진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내가 존경하는 작가님은 쉽지만 심오한 철학 이야기를 가끔 말씀하시곤 한다. 버스 한 정거장도 되지 않는 거리에 존재하는 수많은 카페들 사이에서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커피를 자유롭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향미를 날씨와 함께 음미하며 감사함을 느껴본 이는 많지 않을 수 있다.

 

가을을 부르는 하루, 내가 오른 산의 높이보다 훨씬 더 올라야만 맛볼 수 있는 커피의 소중함을 조금이라도 느껴본다면 오늘 우리가 마시는 커피의 맛은 어제와 다르지 않을까?

 

긴 여름 끝에 찾아온 하늘이 유난히도 파란, 이 계절, 이루려 다짐했던 목표와 다짐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가을의 향기와 커피로 채워보면 어떨까?

 


 

[대한민국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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