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희 작가 에세이

  • 등록 2025.02.18 0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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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하는 순간


그런 날이 있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 잊고 있었던 노래의 멜로디, 그도 아니면 예전에 읽었던 책의 제목이, 시간을 거슬러 홀린 듯이 떠오르는 그런 날.

 

 

며칠 전 성석제의 소설집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2003년)이 그랬다. 번개가 치듯 “아!”하는 감탄사와 함께 “맞아. 나한테 그 책이 있었지.”라는 생각이 퍼뜩 지나간 것이다. 오랜 세월 책꽂이를 지키고 있었건만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지다 내 손에 다시 들려지기까지 참으로 긴 시간이 흘렀다.

 

소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시종일관 미소와 깔깔거리는 웃음을 준비하고 읽어야 하는 책이다. 작가가 그 당시 세태를 풍자한 글들을 읽다 보면 답답함을 느끼기보다 한바탕 웃게 되고, 한심해야 하는데 깔깔거리게 된다.

 

책에 실린 단편 <누가 염소의 목에 방울을 달았는가>에서는 불법 사냥을 천연덕스럽게 비꼬는데, 알량한 인간 심리에 쿡쿡 웃음이 터지면서도 글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시베리아에서 곰 잡던 시절>은 또 어떤가? 한때 곰의 쓸개가 몸에 좋다며 해외에서 불법으로 들여온다는 뉴스가 한창 오르내리던 게 기억난다. 국가적 망신이니 뭐니 말이 많았는데 그걸 또 촌철살인으로 들었다 놓았다 한다. 대부분 글이 그렇게 미소와 유쾌한 웃음을 동반하지만 <약방 할매>처럼 찌르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글도 있다.

 

삶이 팍팍하던 그 시절, 목수 일로 집을 자주 비우시던 아버지, 여섯이나 되는 자식을, 없는 살림에 혼자 건사해야 하는 엄마가 “나”에게는 금방이라도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처럼 어디론가 가 버릴 것만 같아 보인다. 그런 엄마가 가끔 찾아가는 곳이 있다.

 

“아 참, 저 위에 약방 할매한테 갔다 와야겠다.”

그와 함께 우리의 불안은 연기처럼 날아가 버리고 방 안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를 버리고 도망만 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라도 해도 좋았고 어디로 가도 좋았다. -<약방 할매>에서

 

“나”의 눈에는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약방 할매에게 다녀온다는 말은 집을 나가지 않겠다는 몸짓으로 보였던 걸까. 저리 안도를 느끼니 말이다. 세월이 흐르고 엄마는 늙고 나는 결혼해서 아이까지 데리고 명절을 쇠러 고향 집에 내려온 어느 해. 집 뒤 언덕에 올라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넓적한 바위를 발견하고 “나”는 비로소 약방 할매의 정체를 알게 된다. 바로 지금 앉아있는 너럭바위였다. 여섯 자식을 키워내며 엄마는 그 긴 세월 여기에 앉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엄마, 때론 아버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어 가슴이 묵직하고 아리다. 우리는 그들이 삶의 쓸쓸함과 고단함을 그렇게 삭혔던 시간을 먹고 자라나 이제 내가 엄마가 되고 아버지가 되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 시간을 먹고 자라나 이제 엄마가 된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시간을 건네고 있었을까? 엄마의 작은 손짓과 몸짓 하나에도 언어를 찾아내고 기쁨과 불안의 신호를 읽어내는 게 아이들이다. 혹시 아이도 불안한 눈길로 나를 쫓으며 자랐던 건 아닌지 새삼 미안함과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건 엄마이기에 어쩔 수 없음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다. 까르르 넘어가며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 그렇게 재미있어?”라고 아이가 묻는다. 조금 전까지의 미안함과 애처로움은 접어두고, “응, 너무 웃겨. 기가 막히게 썼어.”라고 대꾸하면서도 또 웃는다.

 

책이 떠올랐던 그 순간이 황홀할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번쩍하는 순간임에는 분명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김연희 작가는

글 쓰는 순간이 행복해서 계속 씁니다. 마음과 영혼을 이어주는 글을 통해 의식 성장을 하며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는 작가로 살아갑니다.

 

브런치 작가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는 <치유글약방> 2023, <성장글쓰기>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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