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을 잃은 원두, 닿지 못한 말
브루잉 수업을 마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원두 봉투들을 하나씩 정리한다. 수업에서 사용하고 조금씩 남겨진 원두들, 로스팅 일자를 확인하고 작은 봉투 안의 향을 맡아본다.
‘이건 향이 신선하지 않다. 수업에서 쓰기에는 향이 조금 약하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원두를 쓰레기봉투에 조심스레 버린다. 조용한 강의실에 ‘또르륵’ 서로 부딪치며 떨어지는 원두 소리를 듣다 문득 생각이 멈춘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
‘미안해’, ‘괜찮아’, ‘사랑해’.
짧은 말이지만, 언제 꺼내야 할지 종종 망설여지기도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망설이는 사이,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치면 향을 잃은 원두처럼 의미는 여전하지만, 진심이어도 상대의 마음에 닿지 않는 말들.
‘미안해’라는 말이 늦으면 벽에 닿는 말이 되고,
‘괜찮아’라는 말이 너무 늦으면 위로가 아닌 무관심이 되고,
‘사랑해’라는 말이 늦으면 허공에 닿는 메아리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말에도 향이 있고, 상대가 그걸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타이밍과 닿아야 할 기한이 있듯, 원두도 커피의 향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유통기한이 있다. 원두의 유통기한은 일반적으로 로스팅을 한 날로부터 3개월 이내로 표기되지만, 향과 맛이 가장 뛰어난 기간은 그보다 훨씬 짧다.
브루잉용 원두의 경우, 로스팅 정도에 따라 다르나 로스팅 후 7일에서 21일 사이를 권장한다.
그 이유는 로스팅 과정에서 생성된 원두 안의 이산화탄소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디개싱(Degassing)과 관련이 있다. 디개싱은 커피 향과 맛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산화탄소가 많으면 브루잉 과정에서 물과의 접촉이 방해되어 추출이 불균형하고 향미가 흐려질 수 있다.
반대로, 이산화탄소가 다 빠진 원두는 산소에 노출되어 산화되고 향은 희미해진다.
그래서 브루잉용 원두는 로스팅 후 약 3일에서 7일 사이의 디개싱 기간을 거친 후, 7일에서 21일 사이에 사용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다. 이 시기가 바로, 향과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시간이다.
가장 맛있는 순간은 너무 짧고, 그 순간을 놓치면 아무리 좋은 원두여도 본래의 매력을 다 보여주지 못한다. 이처럼 원두에는 향미를 조화롭게 하는 분명한 유통기한이 존재한다.
사람의 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상대의 마음이 열려 있을 때, 아직 그 마음이 미세하게라도 살아 있을 때,
용기 내어 건네야 하지 않을까?
말에도 유통기한이 있어, 지금이 닿아야 할 순간이라면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하루를 덥히고,
마음을 안아줄 수 있다면 그건 여전히 유효한 말이 아닐까?
나는 향이 바랜 원두 봉투를 정리하며 몇 개의 말을 떠올려본다.
너무 늦어버린 말들. 그러나 그중 몇 개는 어쩌면 닿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드럽게 향이 퍼지듯, 조심스레 마음을 꺼낸 그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에 따스하게 스며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향이 퍼지는 그 찰나처럼, 늦지 않게 상대에게 전해지도록 오늘, 내가 먼저 그 말을 꺼내본다.
‘미안해.’
임지윤
KCIGS 센서리 심사위원
2024 국제요리&제과경연대회 칵테일 라이브 심사위원
2022 MOC (마스터오브카페) 센서리 심사위원
AST(Authorized SCA Trainer)
Q-GRADER (국제아라비카 감별사)
R-GRADER (국제로부스타 감별사)
한국외식조리사중앙회 대외협력이사
2024 대한민국 眞心교육대상 수상
[대한민국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