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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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지워지는 칸

개에게는 의무인 시간이 아이에게는 선택이 된다

내가 반려인에게 가장 자주 하는 처방이 있다. 약이 아니다. 매일 산책시키세요. 매일 놀아주세요. 첫 책에도 이건 보호자의 의무라고 적었다. 보호자들은 대체로 수긍한다. 그 시간이 없으면 개는 병이 난다는 걸 아니까.

 

그 보호자가 집에 돌아가 아이의 한 주를 짠다. 거기서 제일 먼저 지워지는 칸이 방금 그 칸이다. 몸을 쓰고, 뛰고, 친구와 부딪치는 시간. 개에게는 의무였던 것이 아이에게는 선택이 된다.

 

지난해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행복하려면 3가지를 챙기세요.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와 리처드 라이언의 ‘자기결정성 이론’에서 가져온 말이다. 내가 정해서 한다는 감각, 내가 잘하고 있다는 감각,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감각. 두 사람이 사십 년 넘게 확인한 건 이 셋이 취향이 아니라 욕구라는 것이다. 잠이나 끼니처럼, 하나가 비면 나머지 둘로 메워지지 않는다.

 

그때는 마흔 넘은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요즘은 자꾸 아이들 쪽으로 돌려 읽게 된다.

 

어른이 돈과 시간을 쓰는 쪽은 셋 중 하나뿐이다. 유능성이다. 부모가 인색해서가 아니다. 학원은 얼마를 들여 몇 점이 올랐는지 셀 수 있지만, 아이가 스스로 고른 시간과 친구와 어울린 시간은 셀 수가 없다. 그래서 시간표에는 셀 수 있는 것만 남는다. 셀 수 없는 둘이 먼저 지워진다.

 

지워진 자리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질병관리청의 2025년 청소년건강행태조사를 보면 하루 60분 이상 신체활동을 주 5일 이상 하는 중·고등학생은 남학생 24.5%, 여학생 8.5%다. 두 숫자 모두 전년보다 줄었다.

 

지난 4월 이 지면에 아이들을 화면 밖으로 데리고 나와야 한다고 썼다. 오늘은 데리고 나온 다음의 이야기다. 6월에는 아이에게 책상도 주고 운동장도 주자고 썼다. 그때 못 쓴 말이 있다. 둘 다 주자고 하면, 실제로 지워지는 쪽은 늘 운동장이다.

 

운동장에서는 세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난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아이가 정한다. 어제 안 되던 동작이 오늘 되는 걸 몸으로 확인한다. 규칙을 어기면 경기가 멈춘다는 것도 배운다. 규칙은 설명으로 익혀지지 않는다. 어겨 보고, 항의를 듣고, 사과해야 다시 뛸 수 있다는 걸 겪으며 익힌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아이를 운동장에 보내면서 이유를 붙이는 것이다. "운동하면 머리도 좋아진대." 그 순간 운동도 성적을 위한 과목이 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머지않아 배신한다. 성적이 떨어지는 순간 아이는 운동장에서 불려 나온다. 운동을 시킨 이유가 운동을 끊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학교 안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진도가 밀리면 제일 먼저 조정되는 시간이 체육이다. 정해진 수업 시간을 채워야 하는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소한 체육을 무엇과 바꿨는지 아이들에게 말해 주면 어떨까. 아는 아이만 나중에 그 시간을 되찾는다.

 

학원을 관두라는 말이 아니다. 남들 다 하는 걸 우리만 안 할 때의 불안을 모르지 않는다. 순서를 바꾸자는 말이다. 학원을 다 채운 뒤 남는 자리에 그 시간을 넣지 말고, 그 시간을 먼저 잡아 둔 다음 나머지를 채우면 된다. 남는 자리에 둔 것은 언제나 제일 먼저 지워진다. 무엇을 지울지 어른이 혼자 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 자율성 한 칸이 돌아온다.

 

이번 주 시간표에서 가장 먼저 지워진 칸을 떠올려 보자. 그 칸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 지웠다. 아이는 그 손을 보고 있다.



그로쓰 퍼실리테이터 박근필

 

[주요경력]

· 수의사
· 작가, 칼럼니스트, 커리어 스토리텔러
· 박근필성장연구소 소장

· 청소년 진로 직업 특강 외 다수 출강
· 데일리벳 외 다수 매체 칼럼 연재

 

[저서]
· 할퀴고 물려도 나는 수의사니까 (2023)
· 나는 매일 두 번 출근합니다 (2024)
· 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 (2025)
· 방구석에서 혼자 읽는 직업 토크쇼 (2025, 공저)

· 당신의 원고는 왜 계약되지 않는가 (2026)


[참고 링크]

부산 시청 주최 공무원 대상 특강

김해 청소년 진로 멘토링

인천 계양중학교 강연

저자 인터뷰 방송 출연_ONN닥터tv <이 책을 쓴 사람>

진로·커리어 강연 영상

40대 직장인의 80%가 결국 후회하는 것 | 수의사, 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의 작가 박근필

 

 

 

 

50살 정년, 100세 시대, N잡이 선택 아닌 필수인 이유

 

 

[대한민국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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