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 열풍이 거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각색하고 재해석한 작품이다.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가 썼다고 알려진 이 작품은 서양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많은 작가가 이 작품을 모티브로 삼았고, 오늘날의 여러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뮤지컬, 영화, 소설도 이 작품에서 소재와 영감을 빌려왔다.
원작보다 나은 영화는 보기 힘들다지만, 원작을 읽고 독서토론을 해본 적이 있기에 기대가 컸다. 원작이 안겨준 상상의 폭과 주제의 깊이를 어떻게 담아낼지 궁금했는데, 놀란 감독은 색다른 관점으로 접근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갔다. 고전의 서사 구조를 창의적으로 변용해 현대 사회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것이 돋보였다.
‘지략 높은 영웅’에서 ‘속죄하는 인간’으로
첫 장면에서 힙합 가수 트래비스 스콧이 한 영웅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이 찬미가는 마지막에 반복된다.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도 트로이아 전쟁에서 보여준 오뒷세우스의 위대한 업적을 텔레마코스에게 들려준다. 목마 아이디어를 고안하고 탁월한 지략을 발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뒷세우스의 ‘영웅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설정은 오뒷세우스의 인간적 고뇌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이다.
오뒷세우스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명예와 자부심이 아니라, 살육과 기만을 자행한 자신을 향한 죄책감이다. 어떤 사람이 오뒷세우스에게 ‘당신을 영웅이라고 칭송하는 노래를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묻자, 그는 ‘슬픔’이 일어난다고 답한다. 수많은 병사를 죽이고 부하를 모두 잃은 채 홀로 귀향하는 장수가 자기 찬양가를 들으면 어떤 심정일까? 감독은 원작에서 선명히 드러나지 않은 오뒷세우스의 심리 이면을 파고든다.
오뒷세우스는 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시논을 속여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시논이 망자의 해변에서 원혼으로 다가와 원망을 쏟아낼 때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행위를 깊이 성찰한다. 그가 고뇌에 빠질 때마다 환영처럼 찾아오는 아테나는 떨치지 못한 죄책감의 표현이다. 임무를 완수한 오뒷세우스가 페넬로페와 함께 서쪽으로 떠나는 것은 망자의 혼을 달래고 죄를 씻는 의식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아가멤논은 승리의 여운을 음미할 새도 없이 아내의 습격을 받아 죽는다.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닐까?
신뢰·존중 문화의 복원
영화에서는 ‘제우스의 법’이란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환대 규범인 ‘크세니아(Xenia)’를 가리키며,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상호 존중과 신뢰의 도덕 율법을 의미한다. 텔레마코스가 스파르타를 찾아가 메넬라오스 왕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 구혼자들이 페넬로페를 찾아와 술과 고기로 파티를 벌이는 것도 이런 문화의 반영이다. 고대인의 오래된 이 율법을 특별히 부각한 의도는 무엇일까?
놀란 감독은 ‘제우스의 법’을 어길 때 생겨날 문제점을 지적한다. 스파르타와 퓔로스에서는 외부인을 극진히 대접하는 반면, 폴뤼페모스와 라이스트뤼고네스족은 찾아온 사람을 잡아먹는다. 이 율법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 아닐까? 모세스 핀리의 저서 『오뒷세우스의 세계』에 따르면, 고대 동지중해에서는 호혜적 교환 시스템을 통해 정치·사회적 유대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제우스의 법은 오뒷세우스의 성찰과 맞물려 있다. 이 영화는 제우스의 법이 무너지면 야만 사회로 추락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신뢰·존중 문화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성찰과 속죄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신뢰·존중의 문화가 힘을 얻지 못한다. 모든 것이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기에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로 추앙받고, 사람들 사이의 유대 관계는 느슨해져 간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삶의 방식도 다양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환대와 존중을 악용한 구혼자의 태도를 조명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묻는다.
평화를 찾아가는 여정
키르케는 마법을 써서 병사들을 돼지로 만든다. 오뒷세우스가 이유를 묻자, 키르케는 ‘저들은 추악하고 탐욕 가득한 돼지이니 본모습을 찾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에 대한 서늘한 경고이다. 실제로 그리스군은 트로이아 성벽을 무너뜨린 뒤에 학살, 방화, 약탈, 강간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아 성벽이 불타는 것이 마치 온 세상이 불타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죄책감의 표현이요, 전쟁의 허무함을 강조한 말이다.
승리의 영광을 차지한 그리스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온통 상처투성이다.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상처 입은 흑인 여성으로 분장한 것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전쟁의 목적이 헬레네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에게해 해상 무역권 확보였다는 것을 암시하며, 헬레네 또한 전쟁의 희생양이라는 점을 부각한다. 이렇듯 전쟁은 승자와 패자 모두를 불행으로 빠뜨린다.
트로이아 전쟁은 곳곳에 트라우마를 새겼다. 오뒷세우스는 왜 이타카로 돌아가기 전에 저승에 있는 전우를 만나러 가야만 할까? 망자의 해변에서 만난 원혼들이 피를 마시고 오뒷세우스에게 한을 토해내며 원망하는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도 지구촌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평화 안착을 위해서는 탐욕과 오만을 버리고 신뢰·존중 문화를 복원해야 한다는 감독의 의도가 손에 잡힐 듯하다.
주체적 삶, 성장하는 인간
국제사회 문제를 넘어 우리 삶에도 질문을 던진다.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칼륍소는 불사의 몸으로 만들어주겠다며 오뒷세우스에게 무모한 시도를 거두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오뒷세우스는 늙어가는 아내 곁으로 갈 결심을 굳히고 어떤 고통도 감내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풍요롭지만 종속된 삶’보다 ‘고통스럽지만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것이다. ‘고통은 의미를 찾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는 빅터 프랭클의 말처럼, 고통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고통을 통과하지 않고는 주체적 삶에 도달하기 어렵다.
‘텔레마코스의 성장 이야기’도 의미가 있다. 텔레마코스가 구혼자의 위협과 회유에 굴복했거나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했다면 사건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는 떠도는 소문만 듣고 섣불리 체념하는 대신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현실을 읽는 통찰력을 키운다. 탐문 모험을 하는 텔레마코스는 성장해 가는 ‘청년 오뒷세우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탐색과 도전은 성장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다.
우리 교육에 던지는 시사점
이 영화는 놀란 감독의 질문이 낳은 결과물이다. 저자의 질문에 답을 찾는 대신 저자에게 다시 질문하고 스스로 창의적인 답을 도출한 것이다. 특히 고전을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창조적으로 변용한 것이 도드라진다. ‘전쟁 영웅’을 ‘속죄하는 인간’으로 변화시키고, 신뢰·존중 문화 복원이 평화를 안착시키는 마중물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AI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어진 질문에 답만 구하다 보면 AI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우리 교육에 큰 시사점을 던진다. AI에게 대체되지 않기 위해서는 질문하는 능력, 문제 해결력을 신장해야 한다. ‘한국형 놀란’을 키우려면 학생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질문을 통해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질문 중심 교육’이 답이다.

김종두 칼럼니스트
시인·인문학연구원 ‘가람숲’ 대표
(전) 심인고 수석교사
(사)전국독서새물결모임 연구원
[대한민국교육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