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0일 평택아트센터 대공연장. 1천300석 규모의 객석을 채운 관객 앞에서 퓨전오페라 합창극 ‘춘향전’이 막을 올렸다.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공연만큼이나 눈길을 끈 것은 무대 위 배우와 합창단원들이 입은 의상이었다.

이 무대의상에는 동아방송예술대학교 패션스타일리스트과 김혜리 교수와 학생 9명의 손길이 담겼다. 학생들은 김 교수의 지도 아래 전통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퓨전 무대의상 20벌을 직접 제작했다.
이번 협업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지원하고 평택문화재단이 후원한 공연을 계기로 시작됐다. 김 교수는 한국장애문화예술인협회 푸른날개합창단 김향순 단장, 손현미 감독과 지역사회 문화예술 기여 방안을 논의하던 중 ‘춘향전’에 퍼포먼스가 포함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단순히 공연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패션 전공 학생들의 교육과 장애문화예술을 연결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안성에 위치한 동아방송예술대학교가 안성과 평택 등 지역 간 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추진하는 초광역 연계 ANCHOR 사업과도 맞닿았다. 이를 통해 원단비와 학생 장학금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의 현장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김 교수가 학생들에게 제시한 과제는 단순히 ‘예쁜 한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무대에서는 하나의 공연의상이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도 누군가 계속 입을 수 있어야 했다. 특히 장애가 있는 착용자가 불편하지 않고, 현대인이 평상복 위에 덧입어도 어색하지 않은 옷이어야 했다.
전통의상은 재봉선이 외부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만드는 등 일반 의복보다 손이 많이 간다. 김 교수와 학생들은 이러한 전통 제작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착용 편의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디자인을 재해석했다.
한복 특유의 평면재단도 적극 활용했다. 접으면 부피가 크지 않고, 체형이나 성별에 따른 제약이 비교적 적으며, 착용하는 사람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태가 만들어지는 한복의 장점을 살렸다. 그 결과 공연 후에는 봉사자들도 의상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한 번의 무대를 위해 만들어졌다가 창고에 보관되는 공연복이 아니라, 공연 이후에도 생명력을 이어가는 옷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김 교수에게 더욱 의미 있었던 것은 학생들의 변화였다. 자신이 디자인하고 바느질한 옷이 1천300석 규모의 대공연장 무대에 오르고, 조명 아래에서 어떤 색감과 실루엣으로 보이는지 직접 확인하는 경험은 강의실만으로 얻기 어려운 교육이었다.
“학생들이 자신이 만든 옷이 실제 공연에서 어떻게 입혀지고, 조명 아래에서는 색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 직접 경험했습니다. 무대의상을 현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준비는 지난 5월부터 시작됐다. 디자인과 패턴, 원단과 부자재를 준비했고 공연을 앞둔 2주 동안에는 집중 제작에 들어갔다. 20벌의 공연복을 한꺼번에 완성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다림질 과정에서 원단 일부가 눌어붙는 돌발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긴 부분을 눈에 띄지 않도록 다시 재봉하며 끝까지 완성도를 높였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느낀 성취감은 김 교수에게도 교육자로서 특별한 의미로 남았다.
SBS 보도국에서 ‘007’ 영화 현장까지… 경계를 넘어 쌓은 경험이 패션교육의 자산으로
김혜리 교수에게 패션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러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1960년대 의류 관련 학과를 공부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고,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서 패션디자인을 진로로 선택했다. 대학원에서는 의상디자인을 전공했다.
석사과정 당시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던 김 교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SBS 출신 교수의 추천으로 여의도 SBS 보도국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코디네이터’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이던 시절이었다. 약 3년 동안 방송 현장에서 의상과 이미지를 다루며 패션이 미디어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체득했다.
그러나 방송 현장의 경험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당시 국내에서는 ‘패션 저널리스트’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기였다. 보다 넓은 세계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싶어 영국 런던컬리지오브패션 진학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예상하지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2002년 영화 ‘007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 제작 현장에서 영어 동시통역이 가능한 스타일리스트를 찾고 있었고, 김 교수는 리 타마호리 감독이 이끄는 촬영 현장에 합류했다.
약 4개월 동안 스타일리스트와 통역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경험한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은 강렬했다. 추운 환경에서 촬영하는 배우들을 위해 고어텍스 소재로 각자의 체형에 맞는 군복을 제작하고, 신발에는 보온을 위해 양털을 적용했다. 의상 하나에도 막대한 자본과 전문인력이 투입되는 대규모 영화 제작 시스템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영국의 짧은 일조시간에 맞추기 위해 새벽 2시부터 촬영 준비가 시작되는 날도 있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인력이 동시에 움직이는 영화 현장에서 패션은 단순히 ‘옷을 입히는 일’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배우의 움직임과 캐릭터, 촬영환경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종합적인 작업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후에는 대사관에서 약 2년 반 동안 영사과와 경제 관련 업무의 통역을 담당했다. 의전 업무를 비롯해 교육부, 문화관광 분야, 해양수산 분야 등 여러 정부 부처가 협력해 국가 단위의 사업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경험했다.

2004년 7월 한국으로 돌아온 뒤 대학 교육현장에 들어섰고, 2005년 동아방송예술대학교에 패션스타일리스트과가 개설되면서 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대사관에서 배운 ‘협업의 방식’은 대학에서도 이어졌다. 국제협력 업무를 맡아 일본 유학생 유치 등 대학의 국제화 사업에 참여했고, 지역과 대학을 연결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에도 뛰어들었다. 안성시와 함께 TV 프로그램 ‘정책운동회’를 기획하고 직접 출연했으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고등직업연구소에서 정책연구위원으로 연구 활동도 이어왔다.
특히 K-Culture 산업과 전문대학 직업교육의 접점을 찾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K-Culture 분야 전문대학 졸업생 다수가 중소기업으로 진출하는 산업구조 속에서 지역의 문화자원과 전문인력을 연결하고, 생산과 부가가치, 고용으로 이어지는 교육 모델을 만드는 것이 주요 관심사다.
돌이켜보면 영국 생활은 정서적으로 외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술관과 오페라하우스, 바비칸센터 등을 찾아다니며 예술을 보고 경험한 시간은 지금의 미적 감각을 만드는 자양분이 됐다.
김 교수에게는 방송국도, 영화 촬영장도, 대사관도, 대학도 서로 단절된 경력이 아니다. 지금의 교육과 패션을 만들어낸 ‘하나도 버릴 것 없는 경험의 축적’이다.
“좋은 교수보다 ‘그 교수에게 배웠다’고 기억되길”… 예술·AI·지역산업을 연결하는 K-Culture 교육
김혜리 교수의 관심은 패션디자인이라는 한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아이패드를 활용한 디지털 드로잉과 AI 드로잉을 연구하는 동시에 손으로 직접 그리는 핸드드로잉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2020년 작품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어요〉는 제목 그대로 관람자에게 자신의 스타일과 가치 기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강렬한 원색과 거친 질감을 활용해 패션의 자유롭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다. 의상과 화장품뿐 아니라 건축물까지 패션의 요소로 끌어들여 패션이 옷에 한정되지 않고 삶과 공간 전체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2021년 작품 〈삶에서의 패션 브랜드〉에서는 현대인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한 브랜드와 소비, 정체성의 관계를 바라봤다. 부드러운 파스텔 색채와 손으로 그린 듯한 선을 활용해 명품 브랜드가 지닌 권위적인 이미지에 친근하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의류와 신발, 시계, 가방 등 다양한 요소를 한 화면에 배치해 패션이 개인의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임을 표현했다.
그가 주목하는 예술가들의 면면에서도 이러한 확장성이 드러난다.
김 교수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은 서도호다. 특히 ‘옷을 만든다’는 기존의 개념을 넘어 섬유를 통해 공간과 기억, 건축을 표현하는 창의성에 매력을 느낀다.
패션디자이너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구호의 활동 역시 관심 있게 지켜본다. 패션에 머무르지 않고 공연예술과 무대, 공간을 넘나드는 작업 때문이다. 특히 국립무용단과 협업한 무대의상을 보며 절제된 선과 현대적인 감각, 화려한 조명과 움직임이 결합해 춤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예술적 영감은 결국 교육으로 향한다. 김 교수에게 중요한 것은 화려한 결과물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그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실무’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현재 참여하고 있는 안성시 대학순환연계사업도 같은 맥락이다. 지역의 가죽·한지·귀금속·주물·가구 장인들의 기술과 패션을 어떻게 연결하고 새롭게 해석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으며, 결과물을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대중에게 선보이는 방식도 시도하고 있다.
전통 장인의 기술을 대학 안에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생들의 디자인 감각과 결합해 오늘날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상품과 콘텐츠로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김 교수가 강조하는 ‘실무’는 결국 시장과 사회에서 선택받는 결과물을 만드는 경험과 연결된다.
AI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패션 실기교육을 온라인 환경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 AI를 패션교육의 방법론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문과 연구도 지속하고 있다. 전통적인 핸드드로잉을 놓지 않으면서 디지털 드로잉과 AI를 동시에 탐구하는 것도 기술을 대체재가 아닌 확장의 도구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춘향전’ 무대의상 제작 역시 그가 추구해 온 교육의 방향을 압축해 보여준다. 학생들은 캐릭터에 어울리는 의상을 고민하고, 장애가 있는 착용자의 편의를 생각했으며, 전통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원단을 자르고 재봉하는 기술을 넘어 실제 공연장과 조명, 배우의 움직임, 관객의 시선까지 경험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활용할 수 있는 옷을 고민했다.

패션이 예술에서 교육으로, 교육에서 지역사회로, 다시 산업과 K-Culture로 이어진 셈이다.
김혜리 교수가 학생들에게 남기고 싶은 것도 거창한 수식어는 아니다.
“좋은 교수로 기억되는 것보다 ‘내가 저 교수님에게 배웠다’는 기억이 학생들에게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SBS 보도국에서 시작해 할리우드 영화 현장과 대사관을 거쳐 대학 강단으로 이어진 시간, 그리고 미술관과 공연장에서 쌓은 감각, 지역 장인과의 협업, 디지털과 AI에 대한 탐구까지. 서로 다른 길처럼 보였던 경험들은 이제 하나의 방향으로 모이고 있다.
경계를 두지 않고 움직이며 경험을 교육으로 전환하는 ‘액티브한 태도’다.
김혜리 교수에게 패션은 옷 한 벌을 완성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지역과 대학을 연결하며, 전통과 현대를 잇고, 학생을 현장과 연결하는 매개다. 평택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스무 벌의 옷도 그렇게 완성됐다.
그리고 그 옷을 만든 학생들의 경험은 또 다른 K-Culture 현장으로 이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김혜리 교수
동아방송예술대학교 패션스타일리스트과
[대한민국예술신문 최원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