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더 힘들었어! 우리는 크고 작은 일들과 함께 아파하며, 혹은 견디며 살아간다. 어떤 일은 견딜 만하면서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일은 너무 아프다고 누군가에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때로는 누군가에게 표현한 것이 혼자서 견딜 만도 못 할 때가 있다. 그건 표현을 했을 때 돌아오는 말 때문이다. 그 말은 위로와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제2의 또 다른 상처로 돌아오기도 한다. 우리는 첫 번째 상처로도 매우 아프지만, 두 번째 상처에서는 아픔을 떠나 존재감을 잃기도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자살할 생각이나 시도해본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런 분석도 나온다고 한다. “그 일이 일어나서 힘든 게 아니었어요. 이로 인한 주변 말들과 시선이 죽음으로 몰아간 거 같아요”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주변 말들은 어떤 말들인가? 흔히 있을 수 있는 우리 가정의 모습에서 찾아보겠다. 자녀가 친구와의 문제로 부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엄마, 나 오늘 수업시간에 친구랑 싸워서 선생님께 혼났어” 이럴 때 부모님들은 불안과 걱정이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게 너는 왜 수업시간에 싸우고 그러니”라고 말이다. 이럴 때 우
받고만 싶은 나! 받고만 싶은 너! 결혼까지 골인하는 만남은 참 신기합니다. 저도 그렇지요! 숨 쉬어온 공간, 향기 나는 공간, 쉬고 싶었던 공간이 다른 곳에서 자란 사람들끼리 사랑의 호르몬이 나와, 둘이 하나가 되어 결혼까지 이루는 것을 보면 신기하지요, 그러면서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 결실을 이루게 되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하늘의 별이라도 따 줄 것만 같은 사랑도 결혼하고 나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마득히 잊혀지곤 하죠. 그리고 우리는 하나씩 내가 다 해줄 것만 같은 것을 ‘네가 나를 위해서 해줘?’라는 식으로 바꿔 버리곤 합니다. 주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날들이 투정과 비난으로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흔한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지요. 어제는 오랜만에 친구와 톡으로 안부를 주고받았어요, 이 친구는 1년 전에도 남편과의 불편한 관계로 힘들어 저에게 하소연한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남편과의 문제는 엉킨 실타래처럼 그대로 남아있었지요. 친구의 고민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기도 했어요. ‘내가 이렇게 하면 자기가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냐?’ 혹은 ‘자기가 잘못한 걸 알아야지’ 더 나아가 ‘나 내 탓
침지, 여과 - 숫자와 감각 사이 비율, 조율. 비슷하게도 보이는 이 두 단어는 과연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비율(比率)의 사전적 정의는 ‘한 수량이 다른 수량에 대하여 가지는 비’이다. 즉, 수학적으로 둘 이상 수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반면, 조율(調律)은 ‘어울리도록 음을 고르거나, 균형이 맞도록 상태를 조정하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이 두 단어 사이에서 숨 쉬고 있다. 관계를 유지할 때도, 감정을 표현할 때도, 심지어 혼자 있는 순간에도.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나눌지 고민할 때, 우리는 비율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일에 쓸 시간, 밥 먹는 시간, 나만을 위한 시간. 각각의 몫을 정해두고 그 안에 나를 끼워 맞춰보지만, 정해진 비율로는 하루가 부족하기도, 채워지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조율이란 과정을 거친다. 생각보다 일이 오래 걸릴 때는 마음의 여유를 조율하고, 갑작스레 찾아온 공백엔 쉼의 의미를 조율한다. 예상보다 길어진 만남, 지체된 일정 앞에서 우리는 다시 시간의 흐름을 조절하며 나를 맞춰간다. 커피 한 잔을 내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비율과 조율은 필요하다. 몇 그램의 원두에 몇 그램의 물을 부을지, 물의 온도는 몇
부족함을 인정하면 협력할수 있다 혹시,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힘들어 본 적 있으세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혹시 ‘난 없는데’ 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저는 조용히 물어보고 싶습니다. 부족함을 바라볼 마음의 공간이 아직 열리지 않은 건 아닌지요? 그 마음조차도 저는 '괜찮다'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는 인간이기에 부족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족과 잘못에 대한 행동을 처벌없이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그 잘못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사랑과 이해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우리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바꿀 수 있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얼마 전, 딸에게 작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평소처럼 학교를 잘 다니던 아이가 갑자기 학교를 가기 싫다고 했어요. 눈치를 살피고 마음을 다독이며 들여다보니 요즘 아이들 말로 ‘꼽준다’ 라는 신조어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예전 말로 ‘은따’와 비슷한 표현이더군요. 딸은 친구들이 자신에게 꼽주는 행동을 해서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물어보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내가 잘못한게 있는데 그
같은 품종 다른 이야기, 그리고 G1 살랑이는 바람에 붉은 대지와 푸른 녹음이 교차하는 고원 위, 구름이 잠시 머무는 언덕 저 멀리 아바야 호수(Lake Abaya)가 은빛으로 반짝인다. 호수를 감싸 안듯 펼쳐진 고원의 붉은 토양, 바나나 나무 사이를 지난 햇빛이 작은 초록색 커피 열매에 부딪혀 은은하게 사라진다. “향과 맛이 교차하는 경계의 땅, 아바야” 평일과 주말이 교차하는 금요일, 분주했던 한주의 끝자락, 6월의 햇살을 받으며 조금 느린 걸음으로 카페로 들어간다. 브루잉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수강생이 운영하는 카페, 차분한 음악이 공간을 감싼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찾아본다. 직원들과 빵을 만들고 있던 그와 웃으면서 인사를 나눈다. 카운터에 선 그에게 묻는다. “어떤 커피 추천해주실래요? 추천해주시는 커피로 마실게요!” 이어진 그의 대답, “과테말라를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망설임 없이 과테말라 커피와 빵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 그의 브루잉 준비가 시작된다. 브루잉하는 모습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커피가 추출되는 과정을 바라본다. 드리퍼에 원두 가루가 담기고, 첫 물줄기가 떨어진다. 강의실에서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과테말라 커피가 추출
말끝을 3초 늘렸더니 행복이 보인다. 어느 날 감정과 말투는 무슨 관계인지라고 궁금한 적이 있었다. 말투 때문에 감정이 달라지는 걸까? 감정 때문에 말투가 안 좋아지는 걸까? 사실, 과학적이거나 논문 같은 건 잘 모르겠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어쩜 두 가지다 맞는 말인 듯하다. 평범한 우리 집 아침 풍경이다.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남편은 주방으로 (걸어오며) 오면서 말한다. “물 줘" 하라는 짧은 이 두 글자는 1초도 안 걸렸지만, 누가 들어도 명령이라는 생각이 드는 말투이다. 이런 말투 때문에 나도 모르게 순종형인 아내로 지금껏 살아왔지만, 이젠 나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내 변화를 위해선 부탁이라는 것도 필요했다. 얼마 전 읽었던 ‘비폭력 대화’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부탁이라는 것은 상대가 들어줄 수도 있고 안 들어줄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이를 깨닫고 상대의 선택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나서야 정중히 남편에게 부탁할 수 있었다. 다시 남편이 말한 "물 줘"의 두 글자로 돌아왔다. 나는 내가 해야 할 말을 비로소 찾았다. "물 줘" 뒤에 조금의 편안한 쉼과 여유 있는 말투가 필요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여보 "물 줘" 할
후안 발데스를 아시나요? 콜롬비아 커피 안데스의 능선을 따라 안개가 피어오를 때, 붉게 익어가는 커피 체리들. 부드럽고 깔끔한 콜롬비아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콜롬비아의 햇살이 입안 가득 퍼지는 듯하다. ‘후안 발데스(Juan Valdez)’ 밀짚모자를 쓰고, 수작업으로 정성껏 커피를 재배하며 노새와 함께 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은 콜롬비아 커피 농부의 상징이자, 콜롬비아 커피의 얼굴이 되었다. 이 캐릭터는 단순한 마스코트가 아니라, 전 세계에 콜롬비아 커피의 품질과 철학을 전하기 위한 상징이다. 후안 발데스를 브랜드로 만든 곳은 콜롬비아 전역의 커피 농가를 하나로 잇는 연합, FNC(Federación Nacional de Cafeteros de Colombia), 콜롬비아 커피 생산자 연합이다. 1927년, 중간 상인들의 착취와 가격의 불안정 속에서 생계를 위협받던 농민들은 스스로 뭉쳤다. “커피 농가의 삶의 질을 높이고, 세계 최고 품질의 커피를 생산하게 하자.” 그 다짐은 조직의 신념이 되었고, FNC는 그렇게 태어났다. 오늘날 FNC는 50만 명 이상의 커피 농가가 소속된 거대한 공동체다. 품질 관리, 가격 안정화, 농가 교육, 연구소 운영,
있는 그대로, 커피 좋은 사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논리보다 마음이 먼저 알아채는 ‘촉’ 이란 감정으로 알 수 있을까? 일상에서 촉으로 불리는 “육감(六感)”은,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직감에 해당한다. 이 감각은 진짜 감각일까? 아니면 한순간 스쳐가는 사념(思念)일까? 분석이나 논리를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판단, 즉 인간의 인지 기능 중 하나로 심리학에서는 이를 직관(intuition)으로 이해한다. 과학적 관점에서 육감은 인간의 뇌가 오감 외에도 내장 감각, 균형 감각, 온도, 통증 등 다양한 감지 시스템을 종합해 판단을 내리는 복합적 결과로 본다. 말하자면, 육감은 우리 몸 전체의 기억과 경험이 만든 응축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개강 첫날, 자리에 앉은 수강생들을 바라보며 나의 시각과 육감이 분주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표정, 옷차림, 눈빛, 보이지 않는 기류까지 읽기 위해 나의 감각들은 바삐 움직인다. 시선과 생각의 바쁨을 멈추고, 차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질문해 본다. “어떤 커피 좋아하세요?” “고소한 커피요.” “산미가 있는 커피요.” 돌아온 답에 다시 묻는다. “좋은 커피는 어떤
쿨링 - 멈추어야 할 때 “아직 부족해요. 충분하지 않아요.” 시험을 앞두고 긴장과 불안에 여유가 사라진 수강생들의 표정 사이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이 멈춘다. ‘부족’이라는 단어 앞에 나 역시 조용히 서서 그들을 바라본다. 늘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 조금 더 노력하면, 더 오래 참고 버티면, 더 많이 이해하면, 모든 것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성취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당연하고, 늘 그래야만 한다는 전제처럼 따라붙는다. 하지만 언제까지 노력해야 하는지, 얼마나 오래 참아야 하는지, 어디까지 더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더 해야 한다’는 말은 넘치지만,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는 말은 좀처럼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지나치게 버티고, 지나치게 이해하려 노력하며 결국 스스로를 태워버린다. 꼭 배출할 시점을 결정하지 못해 로스터기 안에서 뜨거운 열기에 태워지는 생두처럼... ‘멈춤’ 역시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자주 잊는 나에게 커피는 항상 조용히 말한다. “멈춰야 할
케냐 커피의 산미 – 취향의 경계를 넘어보다 “여러분은 산미가 강한 커피를 좋아하세요?” 커피 향기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마다의 ‘호(好)’와 ‘불호(不好)’를 잠시 접어두고 객관적으로 향미를 평가하는 방법을 배우는 센서리 수업. 나는 불호에서 호가 된 케냐 커피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색함이란 이름에서 친근함이란 느낌에 매력까지. 그렇게 스며든 나만의 ‘케냐 이야기’를 조심스레 시작해본다. 커피의 향미를 알기 전, 처음 만났던 그의 맛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한 신맛이 뜨거운 커피의 온기와 함께 입안에 전해지는 순간, 한 모금을 삼키기도 쉽지 않았다. 뱉어낼 수도, 삼켜버릴 수도 없는 난감하고 낯선 첫 만남에 애먼 커피잔만 바라보며 다시 마셔야 할지 망설였던 기억. 아무리 커피를 잘 아는 사장님의 추천 커피라지만, 케냐 커피는 ‘불호(不好)’ 그 자체였다. 커피 한 잔을 다 비우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던 첫 만남의 기억. 케냐 커피의 강한 산미는 생두 감별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해발 1,500~2,100m의 고지대에서 재배되기에 당분과 유기산의 함량이 놓고, 밝고 복합적인 산미가 만들어진다. 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