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그림자인 괴로움 “엄마….” 오랫동안 기다려 온 소풍날,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로 갈 수 없음을 안 초등학생처럼 딸아이가 나에게 터덜터덜 걸어온다. ‘뭔가 또 일이 생겼나 본데, 이번엔 무슨 일일까?’ “나… 왼쪽 눈 아래에 또 다래끼가 난 것 같아. 나이가 들었는데도 왜 아직도 다래끼가 자꾸 나는 걸까? 너무 속상해.” 이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딸지만, 나이가 들면 괜찮아질 거라 말했던 엄마의 말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한편으로 귀엽기도 한 말이지만, 어쩐지 말 속에 숨어 있는 속상함이 느껴져 말없이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인 나보다도 훌쩍 더 커버린 아이, 이제는 내가 안아준다는 느낌보다는 자신이 폭신한 곰 인형 안듯 엄마를 안는다. 딸의 말처럼 이렇게나 컸는데 왜 아직도 계속 도돌이표인 걸까? 사실 5살 때부터 다래끼를 달고 살았다. 부모인 우리도 경험이 없어서 처음에는 금방 나을 거라는 생각으로 방치했더니 많이 딱딱해져서 시술까지 해야만 했었다. 겁을 먹어서 덜덜 떠는 그 어린아이의 몸을 꼭 붙들고 서로 엉엉 울며 보내야만 했던 시술 시간. 그런 경험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우리는 늘 불안한 마음을 가져야만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관계의 혈류: 말하지 못한 감정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알 것 같은 사이가 있다. 이렇게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사소한 말 한마디로 때로는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모두 이해해줄 것 같은 든든했던 관계, 그러나 그런 나의 믿음과는 달리 예상치 못한 상대의 반응에 당황할 때가 있다. 길지 않은 그 진공의 시간들 속에서, 나와 그 사이에는 어떤 불편한 간극이 존재했던 것일까? 오늘 오후 전화로 대화를 하던 중, 그의 말 한마디가 나의 감정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 그 순간 나는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있었다. 급격하게 차가워진 온도를 서로 확인하는 순간 침묵이 흐르고, 어색한 긴장감마저 감돌게 된다. 그가 한 말 그 자체는 그리 어렵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 아니었지만, 내 마음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이유는 무엇일까? 혼자 가만히 생각해본다. 나의 실수도, 그의 실수도 아닐 수도 있었을 단어의 조합, 문장이었겠지만, 유독 내 기분을 힘들게 한 이유, 그 감정의 끝을 잡고 기억을 더듬어본다. 누구에게나 건들지 말아야 할 역린(逆鱗)이 있을까? 사이가 멀어졌던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그 역린을 건드린 일
엄마를 부르는 계절 햇살이 유난히 좋았던 어느 가을날 오후, 카페에서 만난 딸아이는 평소 즐겨 마시는 커피 대신 건강차를 주문한다. 조금 의아하다. 추운 겨울날에도 아이스아메리카노 커피를 즐겨 마시던 아이이기 때문이다. 항상 밝고 명랑한 아이였는데, 그날 따라 왠지 모르게 진지해 보였다. 딸아이는 찻잔을 매만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머뭇거리며 말했다. “엄마...나... 임신했어.” 수줍은 듯 조용히 가방에서 임신테스트기를 꺼내 보여주었다. 순간, 손끝이 떨렸다. 이 짧은 한마디에 내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벅참이 파도처럼 밀려 오고 있었다. 딸이 엄마가 된다는 사실.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 같기만 한 딸이 아기를 품었다는 일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제 또 다른 생명을 책임질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 순간, 잊고 지냈던 시간의 무게를 실감했다. ‘이제 정말 세월이 흘렀구나’ 그 감동 속에서, 불쑥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리운 나의 어머니. 딸의 임신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고 싶었던 이름. 치매로 서서히 기억을 잃고, 결국 나를 떠났던 엄마. 엄마라 부르면 늘 따뜻하게 돌아보시던 그
가을비 내리는 명절 아침, 글쓰기에 대한 단상 올해 추석 연휴는 다른 해보다 무척 길다. 예전 같았으면 음식 준비와 손님맞이로 분주했을 시간이었겠지만, 이번에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보낸다. 차례 대신 성묘로 간소화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생긴 아침 시간의 여유로움은 혼자 사색하는 시간마저 선물한다. 아무도 없는 이른 시간, 자주 찾던 카페에 앉아 창밖 비 내리는 풍경을 넌지시 바라본다. 가을비에 떨어진 낙엽을 바라보며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노트북 키보드에 손을 얹고 마음에 떨어진 글을 한 톨 한 톨 줍듯 써 내려간다. 글쓰기, 나를 만나는 시간 글을 쓴다는 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작년의 겨울이 마무리 되어갈 즈음, 안부를 가끔 전하던 작가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 사는 게 때론 힘들지요, 그럴 때 어떻게 내려놓으시고, 받아들이시나요?”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금방 답할 수 없었던 그 날의 나를 기억한다. 작가님의 친절한 목소리에는 어떠한 무게감도 실려 있진 않았지만, 수화기를 올려놓으며 내 마음 안에서는 어느새 작은 울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 글을 한 번 써 보는 게 어떨까?’ 사실 그랬다. 어느새 오십, 나는 은퇴 후의 삶
말, 그 무게 가을을 재촉하듯 선선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오랜만에 선배 언니를 만났다. 늘 밝고 당당하던 그녀는 어딘가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먼저 장난치며 웃음을 유도했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따뜻한 커피를 사이에 두고 창밖을 힘없이 바라보는 언니에게 조심스레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요즘 사람들 말이 무서워. 그래서 요즘 많이 우울해” “별말 아닌 것처럼 던지지만 듣는 나는 그저 작아지는 기분이야” 가깝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서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대화 중 툭 던지는 말투, 대놓고는 아니지만 미묘하게 무시하는 듯한 말, 회피하는 눈빛과 함께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라는 말까지. 마치 존재 자체가 필요 없다는 듯한 말들이 조각조각 모여 언니 마음 어딘가를 갉아먹고 있었다. “별거 아닌 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계속 남아. 그리고 하루 종일 반복해서 생각나” 나는 그 순간 말이라는 게 얼마나 한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아프게 할 수 있는지 다시금 느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말을 주
잠시 멈출 때, 몸은 비로소 회복 된다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이란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 그와 관련된 작은 사고나 징후들이 나타난다는 통계학적 법칙을 말한다. 즉 한 건의 대형 사고는 29건의 경미한 사고와 300건의 사소한 증상이 사전에 발생한다는 내용이다. 이 법칙은 주로 산업재해 예방에서 인용되는 이론이지만, 우리 건강에서도 적용해볼 수 있는 측면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 몸은 피로가 누적되면 쉬어야 한다는 작은 경고를 끊임없이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이러한 신호를 무시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쉽게 치료할 수 있었던 작은 통증이 더 큰 고통으로 이어져 일상생활까지 어렵게 한다. 며칠 전 아침 식사시간, 불편한 느낌이 든다. 거울을 보니 혀에 작은 돌기들이 이러한 느낌을 만든 것 같다. 저마다 취약한 곳이 다르지만, 나의 경우 피로가 쌓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증상, 구내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럴 땐 하루 이틀 휴식을 취하고 나면 쉽게 사라질 증상이지만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찬 나는 차마 휴식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못한다. 결국, 일정에 떠밀린 채, 몸이 애써 보내온 신호를 외면하곤 한다. 처음엔 아주 작은 크
쓸쓸한 은퇴가 아닌 새로운 시작 나는 평소에는 메일을 잘 열어보지 않는 사람이다. 알람이 오면 의식적으로 확인하는 문자에 이미 익숙해서인지, 나에게 아무런 표시를 해주지 않는 메일에는 다소 소홀한 듯하다. 그런데 오늘은 새벽부터 이유 없이 메일을 확인하고픈 마음이 들었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만큼의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내가 애정을 쏟아온 ‘네이버 오디오클립’의 서비스 종료 소식이었다. 2022년에 우연히 네이버 오디오클립을 알게 되어 나는 채널을 개설했다. 사람들을 직접 마주하는 일에 특히 어려움이 있었던 나에게, 음성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오디오클립을 만들려면 대뵨이 필요했지만, 그 당시 글쓰기가 부족했던 탓에 오래 이어가지 못하고 나의 작업은 결국 멈추고야 말았다. 2024년 여름부터는 새벽 기상을 함께하는 분들에게 동기부여를 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매일 2~3분 분량의 짧은 동기부여 메시지를 전달하며, 마치 라디오 DJ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오디오 클립은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이어왔다. 그런데 오늘 아침, 생각지도 못했던 채널 종료 메일을
사랑한다면 말해주세요 당신은 어떤가요?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인가요? 사랑하는 방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자연스럽게 스킨십으로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 마음을 조용히 간직해두는 사람도 있지요. 그렇다면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줄까요? 가을 오후, 친구와의 진솔한 대화 깊어가는 가을 정취가 느껴지는 오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특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야외 테라스가 아름다운 카페에서 만난 우리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소중한 이야기들을 펼쳐놓으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친구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둔 고민을 조심스럽게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길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부부를 볼 때마다 친구는 마음 한편이 부러웠다고 합니다. 천성적으로 애정표현이 자연스러운 그녀는 남편에게 "사랑해"라는 말과 함께 일상 속 작은 스킨십을 시도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남편은 어색해하며 그녀를 살짝 밀어내곤 한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남편은 잠깐 이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 버린다고
어른으로 산다는 것 어느 날, 친구가 조용히 내게 말한다. “신기하게 마음을 바꾸니까, 일도 풀리더라” 그 말이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살아보니 그렇다. 나이 오십을 넘기고, 예순을 지나며 몸은 예전과 같지 않다. 눈은 침침해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와 무릎이 뻐근함을 쉽게 느낀다.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을 감기조차 며칠을 안고 간다. 며칠 밤낮을 새워도 다음 날 아침이면 아무렇지 않던 시절이 이제는 꿈만 같다. 정직한 몸은 에둘러 어려운 말을 하는 대신, 내게 한계를 알려준다. ‘쉬어야 한다’, ‘무리하지 마라’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몸이 튼튼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랬던 시간들은 분명 나에게도 존재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친구의 말처럼 결국은 마음이 문제였다. 내가 세상을 풀어가는 방식, 내 안에 쌓여 있는 생각과 감정의 무게가 결국 삶의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는 걸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원망이 줄고 여유가 생긴다. 마음을 바꾸니, 풀리지 않던 일들의 실마리가 드러난다. 또 싸워야 할 것 같은 문제들이 그냥 스쳐가도 괜찮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몸은 분명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고슴도치에게 배우는 지혜 서운한 감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오늘 아침은 웬일인지 그렇지 않다. 아마도 어젯밤 불편한 감정을 안고 잠자리에 들어서일까? 아침에 눈을 떴지만, 여전히 상대에게 기대했던 답을 듣지 못한 나에게는 서운한 감정이 이어진다. 이런 나의 기분 상태에서 마침 주변 누군가의 말투가 도화선이 되는 순간 나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간다. 마치 성냥개비 하나에 불이 붙어 순식간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아침을 가볍게 먹고, 노트북과 책 몇 권을 챙겨 근처 카페로 향한다. 여느 때 같았으면 휴일 아침, 직장이 아닌 카페로 가는 나의 발걸음은 더없이 가볍고, 즐거운 마음에 콧노래도 절로 나왔겠지만, 무거운 마음은 나를 어느새 카페에 데려 놓았다. 나를 알아봐달라는 내면의 작은 외침이 허공에 떠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우울감마저 들었다. 단골 카페에 도착한 나는 남들이 모르는 구석진 자리에 책을 올려놓았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니 두통까지 찾아와 집중이 되지 않는다. 무심한 시계의 초침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점점 더 어지럽게 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