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요한 용무가 있어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오래 가는데도 받지 않았다. ‘사정이 있나보다 기다리면 전화 해 주겠지’하며 기다렸다.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잠시 후 또 걸었으나 역시 받지를 않았고 대꾸도 없었다. 다음 날도 그랬고 며칠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정이 있나보다 했다가 걱정이 되었다가 슬슬 화가 났다. ‘문자라도 하나 보내주든지...뭔가 설명이 있어야 할 텐데....뭔가 오해가 있나?, 아니, 자기는 잘 나가는 사람이고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벼라 별 생각이 나면서 문자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퍼부을까? 돌려서 내 섭섭함을 알아채게 말을 할까?’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우고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며칠이 더 지났고 우연히 다른 이를 통해 그이는 몸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생겨 서울의 대형 병원에 입원하여 중환자실에서 수술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전화도 할 수 없고 면회도 제한된 상태라고 한다. 충격과 함께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이에게 만약 언짢은 문자를 보냈더라면 어쨌을까! 모골이 송연했다. 오해는 사
조선 중기(인조-효종)의 문신이었던 유계는 함경도로 귀양을 갔다가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민정중이라는 젊은 선비를 만났다. 둘은 목적지가 같은 방향이니 말동무나 하자며 동행을 했고 얼마쯤 가다가 해는 이미 저물고 날이 어두워졌는데 유계와 민정중은 냇물을 건너게 되었고 부실한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민정중이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고 물에서 나온 민정중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다리를 헐어내었다. “아니 이보게 선비, 어째서 다리를 헐어버린단 말인가!” “예, 저는 비록 다치지 않았지만 날도 어둡고 뒤따라오는 과객들이 이 다리로 인해 다칠 것이 분명하니 이것을 헐어 버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유계는 민정중의 사려 깊음에 감탄하고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과연 유계의 생각대로 민정중은 훗날 좌의정이 되었다. ‘나는 이미 건넜으니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낡은 제도나 모순되고 불합리한 규정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미 억울함을 맛보았으니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생각은 우리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어설픈 다리를 헐어버려야 불필요한 부상을 미연에 막을 수 있듯이 낡은 제
내가 시인 윤동주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시 저변에 흐르는 ‘부끄러움’이라는 정서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갈망하던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결 같은 미세한 가책에도 괴로워했고 현실은 일제 강점기이고 암울하기만 한데 자신의 시가 너무 쉽게 씌어 진다고 부끄러워한다. 그에게는 명월을 짖는 밤 개 소리마저도 자신을 질타하고 꾸짖는 소리로 들린다. 그는 도대체 무슨 과거가 있길래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다지도 자신을 부끄러워할까. 일제(日帝)에 빌붙어 정작 부끄러운 짓을 한 자들은 작위(爵位)를 받고 부(富)를 축적하는데 그는 조국이 처한 현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에게 분노와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시 속에는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미움, 가엾음, 그리움의 감정들이 교차한다. 그가 얼마나 내면 깊숙이 성찰과 반성을 거듭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맹자는 생전에 ‘군자에게 있는 세 가지 즐거움’, 즉 인생삼락(人生三樂)을 말하면서 두 번째 즐거움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것’(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을 말했다. 맹자는 또 사람의 본성 네 가지를 말하는 가운데 수오지
어떤 초등학교가 있었다. 운동장도 좁고 더구나 낭떠러지가 있어서 자칫 아이들이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대책 마련을 위한 운영위원회가 열렸고 두 명의 열성적인 교육위원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한 사람은 만약에 대비해 사고당한 아이를 즉시 후송할 앰뷸런스를 구입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돈으로 울타리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위원회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장시간의 토론 끝에 엠뷸런스를 구입하기로 했다. 속담이 말하는 대로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겪는 많은 사건 사고 후 가장 많이 듣는 말들은 ‘인재(人災)’였다느니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느니 ‘안전 불감증’이라느니 하는 말이다. 그것은 산불과 같은 대형 화재나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 시에도 마찬가지다. 올해만 해도 전반기가 채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차마 믿기지 않는 사건 사고가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많이 일어났다. 우리는 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때늦은 후회를 하는 것일까? 신임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안전문제를 짚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어느 호텔에서 주방 직원을 채용하는 광고를 내고 면접을 했다. 참가자들에
‘비교’라는 단어에 사용되는 비(比)는 날카로운 칼(匕) 두 개를 서로 견주는 것이다. 즉, 어느 것이 더 날카로우냐 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가치중립적이어서 사용하기에 따라 긍정적인 효과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소지가 다분하다. 비교는 두 가지로 쓰이는 수가 있는데 타인에 의해 내가 누군가와 비교되어 평가 받는 것이 하나이고 내가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여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엄마, 나 오늘 산수 90점 받았어!” 자랑하고픈 아이에게 “아무개는 몇 점 받았는데?” 하거나 아이가 백 점을 받았다고 해도 엄마는 칭찬 대신 학급에 백 점짜리가 몇 명인가를 묻는다. 자신의 자녀 외에 다른 백 점이 있으면 문제가 쉬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절대평가를 하지 않고 누군가와 비교해 자리매김을 한다면 아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의 기대치를 충족할 수 없음을 알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 이 ‘비교’가 자칫 우리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도 정당화 하게 한다. 해서는 안 되는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도 ‘나만 그런가? 남들도 이 정도는 다 하는 일이야!’ 하며 위안을 찾는다. 검은 셔츠를 입으면 목에 하얀 때가 낀다.
유태인의 탈무드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청각 장애인 두 사람이 길에서 마주쳤다. “여보게, 고기 잡으러 가나?” “아니, 고기 잡으러 가.” “응, 난 고기 잡으러 가는 줄 알았지.” 그리고 둘은 각각 자기 길을 간다. 마치 오늘날 우리의 정치 현실과 국민들의 여론을 보는 것 같다. 모두들 상대의 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자기 말만 한다.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앖는데 상대방이 귀머거리인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그 둘은 또 두 동강이 난다. 한 번은 어떤 사내가 이비인후과 병원에 들렀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실은 내가 아니라 제 아내가 요즘 잘 듣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본인이 오셔야지요.” “그렇기는 한데 워낙 병원을 싫어해서요.” “그럼 댁에 가셔서 부인께서 얼마나 떨어진 거리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못 들으시는지 알아 오십시오.” 사내는 집으로 갔다. 현 관에 들어서니 아내는 주방에서 저녁을 짓고 있었다, “여보, 저녁 메뉴가 뭐야?(11미터)” “......” “저녁 메뉴가 뭐냐고- (7미터)” “....” “저녁 메뉴가 뭐냐니까? (4미터)” “.....” “저녁 메뉴가 뭐냐고 여러 번 물었는데...(2미터)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가졌으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미모가 출중했고 왕비였다. 그런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손거울이었다. 그녀는 거울에게 수시로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고 바로 ‘당신’이라는 대답을 들어야만 안도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당신이라는 대답 대신 ‘백설 공주’라는 거울의 대답은 그녀를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빠뜨렸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백설 공주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번민의 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생을 보낸다. 손거울이 문제였을까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문제였을까. 나에게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 좀 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대다수의 것으로 많이 가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무언가의 결핍은 지난(至難)한 삶을 더욱 공허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물질의 결핍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결핍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결핍된 영혼은 물질로 채울 수 없으며 설사 많은 물질이 주어진다 해도 행복을 안겨주진 않는다. 장례식에서 슬픈 울음이 나는 곳은 가난한 집이고 고성이 들리는 집은 부잣집이라는 씁쓸한 이야기가 있다. 고인
‘악마는 특별하지 않다. 단지 ‘무사유(無思惟)'할 뿐이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악명 높았던 전범(戰犯)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렸다. 그는 600백만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내 처형을 한 책임자였고 독일 패망과 동시에 아르헨티나로 도망하여 15년을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살았지만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끈질긴 추적과 장남의 철없는 누설 끝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재판과정을 생중계했고 전 세계인이 숨을 죽이며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다. 한편 이 소식을 듣고 대학교수였던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으로 날아가 재판 과정을 취재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의 책에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부제를 덧붙여서 펴냈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유대인 600만 명을 ‘처리’하기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에 앞장섰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성인 남성처럼 보였다. 이웃과 가족에게 친절했으며, 풍채 또한 상상과는 달리 왜소한 편이었다. 그는 아이에게는 바람직한 아버지였고, 아내에게는 바람직한 남편이었으며, 아웃
얼마 전 지인을 만나러 전남 장흥을 다녀왔다. 지인의 안내로 점심을 먹으러 한 식당을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쌀쌀한 날씨임에도 한참을 밖에서 기다린 후에야 가까스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식사 중, 손님이 넘쳐나는 걸 보니 유명한 식당인가 보다고 했더니 대답하기를 지금은 손님이 많이 떨어졌지만 여기보다 더 붐비던 식당이 근처에 있단다. 그래서 왜 손님이 줄었는지 혹 주인이 바뀌었는지 물으니 주인이 바뀌지는 않았는데 너무 불친절한 것이 원인이란다. 순간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인이 처음부터 불친절했다면 애초부터 손님이 넘쳐나지 않았을 텐데 필시 장사가 잘 되니 주인의 태도가 바뀌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편 내가 아는 식당 생각도 났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식당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인이 나이도 들고 건강이 여의치 않아 운영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듣자 한 사람이 재빨리 인수를 했다. 그러나 손님이 서서히 줄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식당은 주인이 또 바뀌었다. 실패한 연유를 주인만 모르고 다른 이들은 알고 있다. 이전 주인은 새벽시장을 가서 최고의 식자재를 구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그날의 음식은 절대로 다음 날 다시 나오는 법
민수(가명)라는 아이와 속엣 말을 하기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너는 장래 희망이 무엇이야?” “경찰이요.” “아, 그래. 특별히 경찰이 되고 싶은 이유가 있느냐?” “아버지를 잡아 가둘 거요.” “.....” 아이는 이마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이마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학원을 안 갔다고 골프채로 맞아 이마가 쪼개지다시피 한 흉터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맞은 기억만 있다고 했다. 민수는 내가 만난 아이들 중에 드물게 보는 힘든 아이였다. 담임과 상담교사와 교감을 거쳐 나한테까지 왔다. 부모에 대한 강한 증오와 열등감으로 뒤틀려 있었고 외모 콤플렉스로 사시사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는 코로나 팬데믹이 있기 전이었다.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력감뿐이었고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아 모든 선생님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실은 내가 동의하면 자퇴를 하는 수순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무동력선을 보는 듯 했다. 나는 민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네가 너무 힘들어하니 하루에 한 시간은 아무 조건 없이 내 방에 와서 쉬게 해주마. 내가 교과 선생님께는 상담을 한다고 해 줄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영어도 수학도 아니고 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