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발데스를 아시나요? 콜롬비아 커피 안데스의 능선을 따라 안개가 피어오를 때, 붉게 익어가는 커피 체리들. 부드럽고 깔끔한 콜롬비아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콜롬비아의 햇살이 입안 가득 퍼지는 듯하다. ‘후안 발데스(Juan Valdez)’ 밀짚모자를 쓰고, 수작업으로 정성껏 커피를 재배하며 노새와 함께 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은 콜롬비아 커피 농부의 상징이자, 콜롬비아 커피의 얼굴이 되었다. 이 캐릭터는 단순한 마스코트가 아니라, 전 세계에 콜롬비아 커피의 품질과 철학을 전하기 위한 상징이다. 후안 발데스를 브랜드로 만든 곳은 콜롬비아 전역의 커피 농가를 하나로 잇는 연합, FNC(Federación Nacional de Cafeteros de Colombia), 콜롬비아 커피 생산자 연합이다. 1927년, 중간 상인들의 착취와 가격의 불안정 속에서 생계를 위협받던 농민들은 스스로 뭉쳤다. “커피 농가의 삶의 질을 높이고, 세계 최고 품질의 커피를 생산하게 하자.” 그 다짐은 조직의 신념이 되었고, FNC는 그렇게 태어났다. 오늘날 FNC는 50만 명 이상의 커피 농가가 소속된 거대한 공동체다. 품질 관리, 가격 안정화, 농가 교육, 연구소 운영,
있는 그대로, 커피 좋은 사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논리보다 마음이 먼저 알아채는 ‘촉’ 이란 감정으로 알 수 있을까? 일상에서 촉으로 불리는 “육감(六感)”은,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직감에 해당한다. 이 감각은 진짜 감각일까? 아니면 한순간 스쳐가는 사념(思念)일까? 분석이나 논리를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판단, 즉 인간의 인지 기능 중 하나로 심리학에서는 이를 직관(intuition)으로 이해한다. 과학적 관점에서 육감은 인간의 뇌가 오감 외에도 내장 감각, 균형 감각, 온도, 통증 등 다양한 감지 시스템을 종합해 판단을 내리는 복합적 결과로 본다. 말하자면, 육감은 우리 몸 전체의 기억과 경험이 만든 응축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개강 첫날, 자리에 앉은 수강생들을 바라보며 나의 시각과 육감이 분주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표정, 옷차림, 눈빛, 보이지 않는 기류까지 읽기 위해 나의 감각들은 바삐 움직인다. 시선과 생각의 바쁨을 멈추고, 차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질문해 본다. “어떤 커피 좋아하세요?” “고소한 커피요.” “산미가 있는 커피요.” 돌아온 답에 다시 묻는다. “좋은 커피는 어떤
쿨링 - 멈추어야 할 때 “아직 부족해요. 충분하지 않아요.” 시험을 앞두고 긴장과 불안에 여유가 사라진 수강생들의 표정 사이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이 멈춘다. ‘부족’이라는 단어 앞에 나 역시 조용히 서서 그들을 바라본다. 늘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 조금 더 노력하면, 더 오래 참고 버티면, 더 많이 이해하면, 모든 것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성취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당연하고, 늘 그래야만 한다는 전제처럼 따라붙는다. 하지만 언제까지 노력해야 하는지, 얼마나 오래 참아야 하는지, 어디까지 더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더 해야 한다’는 말은 넘치지만,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는 말은 좀처럼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지나치게 버티고, 지나치게 이해하려 노력하며 결국 스스로를 태워버린다. 꼭 배출할 시점을 결정하지 못해 로스터기 안에서 뜨거운 열기에 태워지는 생두처럼... ‘멈춤’ 역시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자주 잊는 나에게 커피는 항상 조용히 말한다. “멈춰야 할
케냐 커피의 산미 – 취향의 경계를 넘어보다 “여러분은 산미가 강한 커피를 좋아하세요?” 커피 향기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마다의 ‘호(好)’와 ‘불호(不好)’를 잠시 접어두고 객관적으로 향미를 평가하는 방법을 배우는 센서리 수업. 나는 불호에서 호가 된 케냐 커피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색함이란 이름에서 친근함이란 느낌에 매력까지. 그렇게 스며든 나만의 ‘케냐 이야기’를 조심스레 시작해본다. 커피의 향미를 알기 전, 처음 만났던 그의 맛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한 신맛이 뜨거운 커피의 온기와 함께 입안에 전해지는 순간, 한 모금을 삼키기도 쉽지 않았다. 뱉어낼 수도, 삼켜버릴 수도 없는 난감하고 낯선 첫 만남에 애먼 커피잔만 바라보며 다시 마셔야 할지 망설였던 기억. 아무리 커피를 잘 아는 사장님의 추천 커피라지만, 케냐 커피는 ‘불호(不好)’ 그 자체였다. 커피 한 잔을 다 비우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던 첫 만남의 기억. 케냐 커피의 강한 산미는 생두 감별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해발 1,500~2,100m의 고지대에서 재배되기에 당분과 유기산의 함량이 놓고, 밝고 복합적인 산미가 만들어진다. 케
린싱, 다정함을 준비하는 시간 출근길, 버스 정거장에 섰다. 너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미풍이 머리카락을 흔든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위로 벚꽃잎 무리가 하늘거리며 쏟아진다. 봄바람은 그렇게 온기를 빼앗아가면서도, 꽃잎 한 장으로 다시 다정해진다. 벚꽃이 흩날리는 아침, 눈을 감고 볼과 머리카락에 닿는 부드러운 봄바람을 음미해 본다. 도착한 강의실, 가방 안 다이어리를 꺼내려다 눈에 들어온 작은 벚꽃잎 한 장에 마음이 멈춘다. 누군가 나 몰래 살며시 넣어주었을 법한 다정함이다. 바람에 실려왔는지 가방 틈으로 들어온 봄바람의 토닥임이 정겹기만 하다. 그 순간, 다가온 울컥함. 아무 말 없이 건네오는 봄의 인사에 눈가가 따뜻해져 온다. 꽃잎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커피를 추출한다. 서버 위에 드리퍼를 올리고,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필터지를 접어 드리퍼에 끼우고 뜨거운 물을 조심스레 부우며 필터지를 최대한 드리퍼에 밀착시킨다. 필터커피를 추출할 때 드리퍼의 필터지에 물을 부어 미리 적셔주는 과정을 린싱(rinsing)이라 한다. 미세하게 있을 수 있는 종이 냄새와 맛을 제거하고, 필터와 드리퍼를 밀착시켜 리브(Rib)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커피
향을 잃은 원두, 닿지 못한 말 브루잉 수업을 마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원두 봉투들을 하나씩 정리한다. 수업에서 사용하고 조금씩 남겨진 원두들, 로스팅 일자를 확인하고 작은 봉투 안의 향을 맡아본다. ‘이건 향이 신선하지 않다. 수업에서 쓰기에는 향이 조금 약하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원두를 쓰레기봉투에 조심스레 버린다. 조용한 강의실에 ‘또르륵’ 서로 부딪치며 떨어지는 원두 소리를 듣다 문득 생각이 멈춘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 ‘미안해’, ‘괜찮아’, ‘사랑해’. 짧은 말이지만, 언제 꺼내야 할지 종종 망설여지기도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망설이는 사이,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치면 향을 잃은 원두처럼 의미는 여전하지만, 진심이어도 상대의 마음에 닿지 않는 말들. ‘미안해’라는 말이 늦으면 벽에 닿는 말이 되고, ‘괜찮아’라는 말이 너무 늦으면 위로가 아닌 무관심이 되고, ‘사랑해’라는 말이 늦으면 허공에 닿는 메아리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말에도 향이 있고, 상대가 그걸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타이밍과 닿아야 할 기한이 있듯, 원두도 커피의 향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유통기한이 있다. 원두의 유통기한은 일반적으로 로스팅을 한 날로
인퓨즈드 커피 - 하루를 함께 살아주는 향 하늘이 뿌연 수요일 아침, 나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잘 잤어? 좋은 아침.” 흐린 하늘처럼 마음마저 무거운 날, 향이 좋은 커피 한 잔과 마음이 흐를 수 있는 글 한 줄로 아침을 열어본다.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고, 베이글을 굽고, 콜롬비아 원두를 그라인딩하자 체리향이 방안에 퍼진다. 원두가루에 뜨거운 물이 닿자 하얀 꽃잎이 하늘거리는 봄날, 살며시 찾아든 체리향이 방 안에 퍼진다. 커피에서 체리향이 이토록 선명하고 풍성하게 잘 느껴지는 이유는 특별한 가공 방식에 있다. 인퓨즈드 가공(Infused Processing)은 생두를 발효·건조시키는 과정에서 체리, 열대과일, 바닐라와 같은 특정 향미를 가진 천연 재료를 함께 넣어 자연스럽게 향이 생두에 스며들게 하는 가공 방식이다. 콜롬비아에서는 최근 몇 년간 인퓨징 가공 방식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콜롬비아의 El Paraiso 농장은 이러한 가공 방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농장이다. 단순히 향을 첨가하는 것이 아닌, 부드럽게 생두 안에 특정 향을 스며들게 하는 섬세한 가공 과정이다. 생두를 저온에서 발효시키며 생두의 미세한 구조 속으로
스모키한 향기 속에 숨겨진 시간들 “강사님! 오늘 너무 추워요!”라며, 몸을 잔뜩 움츠리고 강의실로 들어서는 수강생, “오늘 날씨 너무 춥죠? 어제도 추웠는데 오늘도 춥네요. 우리 따뜻한 드립커피 한 잔 마시고 시작할까요?” 라는 질문에 “좋아요.”라는 답이 이어진다. 엊그제 로스팅한 과테말라 원두를 그라인딩한다. 분쇄된 원두가루에서 스모키한 향이 퍼지고, 뜨거운 물이 원두가루를 적시며 과테말라 커피가 서버에 담기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3월의 추위, 주말 아침을 움츠리며 학원으로 왔을 수강생들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에 공감이란 마음을 녹여 정성스레 물을 부어준다. 스모키한 향에 18세기 후반 과테말라 커피 역사의 시작이 코끝을 스치듯 다가온다. 오늘날 전 세계인들에게 스모키한 향과 묵직한 바디로 사랑받는, 스페인 식민지 수도원 정원에 재배되던 작은 커피나무가 과테말라 전체를 대표하는 산업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과테말라의 커피는 18세기 후반, 예수회 수도원의 정원에서 관상용, 약용으로 재배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과테말라 고지대의 기후와 토양이 커피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9세기 중반 본격적으로 재배가 확산되며 상품 작물로 전환되었다.
디카페인,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주다 커피가 인연이 되어 만난 사람들, 같은 하루 다른 시간대에 사는 나를 그들에게 맞추기 위해 연차를 내고 카페로 향한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마음이 계단을 한걸음에 오르게 만든다. 성큼성큼 걸어 카페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반가운 그들이 멀리서 보인다. 오늘은 강사가 아닌 인생의 선후배로서 서로 둥근 테이블에 마주 앉아 삶의 향미를 나누려 한다. 가벼운 안부를 나누고 커피를 주문한다. 여러 메뉴 중 디카페인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나라 생두인지 정보가 쓰여 있는 다른 커피들 사이에 아무런 정보 없이 덩그러니 혼자 있는 네 글자. ‘디카페인’ “디카페인 따뜻하게 주세요.”라고 주문을 하니 “선생님! 디카페인 커피 드실 거에요?”하고 의아한 듯 묻는다. “네, 오늘은 이 아이를 알아보고 싶어요.”라고 웃으며 대답을 한다. 디카페인 커피는 생두에서 카페인 성분을 일정 부분 제거한 커피를 의미한다. 카페인 성분을 전부 제거한 것이 아닌 카페인 함량을 줄여 그 성분이 소량인 커피를 디카페인 커피라고 한다. 디카페인 커피에 대한 기준은 국가마다 상이하다. 미국의 식품의약국(FDA)에서는 카페
나에게 선물한 건 바로 기다림, 그리고 더치커피 하고 싶은 일에 온전히 시간을 쓸 수 있는 휴일. 나에게 어떤 시간을 선물할까 잠시 고민한다. 고민을 끝내고 과테말라 원두를 그라인딩 한다. 분쇄된 원두가루 위로 물이 조금씩 떨어지도록 더치커피 추출도구의 밸브를 조절한다. “기다림” 커피의 시간이 멈춘 듯한 휴일 아침, 나에게 선물한 건 기다림이다. 버튼을 누르면 10초 이내에 추출이 시작되는 에스프레소, 물을 붓기 시작하면 몇 초 이내에 서버 안으로 커피가 추출되기 시작하는 핸드드립 커피와는 다른 더치커피, 오늘은 느림의 미학이 맛에 숨겨져 있는 더치커피를 나에게 선물하려 한다. 더치커피(Dutch Coffee, Cold Drip Coffee)는 ‘네덜란드식 커피’라는 의미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17세기 인도네시아에서 커피를 대량으로 생산한 후, 유럽으로 수출하는 과정에서 생긴 추출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으로 가는 긴 항해 동안, 커피를 끓여 보관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차가운 물로 천천히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이 개발된 것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차가운 물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할 경우, 무더운 기후에도 보관이 쉽고, 항해의 긴 시간 동안 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