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재 대한민국 5천 년 역사의 단군 이래 최대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변변한 자원 하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일궈낸 동력은 뭐니해도 단연 '교육'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부모 세대의 뜨거운 교육열은 국가 발전의 엔진이었으며, '하면 된다'는 정신은 일찍이 한강의 기적을 성취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이듯 모든 것에 양면성이 있다, 물질적 풍요의 정점에서 우리 교육은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기괴한 역설에 직면했다. 이는 혹자들이 비난하듯 결코 자기비하가 아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9~24세)의 사망 원인 1위는 11년째 '자살'이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 성장을 이룩했지만, 정작 나라의 미래인 아이들은 과도한 경쟁과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정신적 피폐함으로 스스로 생을 등지고 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역사상 가장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났음을 재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은 '감사함'을 배울 기회를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당연
인류의 고전 『일리아스』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집중되었고, 영화팬들의 호기심 만족을 위한 영화 <트로이>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영화의 배경 중에는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을 일시적으로 멈춘 한 장면이 있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적장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무릎을 꿇는 장면의 연장선에서 나온다. 절대 권력을 지닌 왕이 체면을 내려놓았고, 분노에 사로잡혔던 영웅은 복수를 멈추었다. 그 결과 12일간의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에 고전의 원전과 영화를 근거하여 진정한 엘리트란 누구이며 왜 그런지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는 ‘엘리트’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한다. 명문대 졸업장, 고시 합격, 화려한 경력은 곧 능력의 증표로 간주된다. 정치권과 고위 관료 집단은 우리 교육 시스템이 길러낸 최상위 엘리트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분명 치열한 경쟁을 통과한 인재들이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치열함이 과연 공동체를 위한 책임 의식과 도덕적 절제까지 길러냈는가? 최근 수년간 급속히 냉각되어 온 정치적 갈등과 정책 혼선, 책임 회피와 진영 논리는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들이 보여준 민낯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최근 한 교육언론에 의하면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인권친화적 학교 조성 정책 권고」를 통해 “갈등을 법으로만 해결하려는 학교 문화”의 개선을 촉구했음을 보도했다. 이는 단순한 제도 개선 권고를 넘어, 우리의 학교가 어느새 ‘사법화’의 와중에 빠져 있음을 경고하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교실에서 벌어진 갈등이 대화와 중재 대신 고소·고발과 행정심판, 소송으로 이어지는 현실은 교육의 본질을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법은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학교는 법이 시작점이 되고 있다. 실제로 교육 현장의 사법화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폭력 실태조사’와 각 시·도교육청 자료에 따르면, 학교폭력 관련 행정심판 및 소송은 최근 수년간 증가 추세를 보였다. 법무법인을 통한 대응, 생활기록부 기재를 둘러싼 분쟁, 교권 침해에 대한 형사 고소 등은 일상이 되었다. 갈등 해결의 언어가 ‘사과’와 ‘회복’이 아니라 ‘증거’와 ‘처벌’로 대체되는 최근 학교의 모습은 자의든 타의든 배움의 공간이기보다는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법적 투쟁의 장으로 변질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17개 각시도 교육청과 교육부는 교사 법적 소송 관련 비용을 지원하는 예산을 별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이 말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하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 구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타인지다. 메타인지는 왜 중요할까. 모든 것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 모르면 막막해서 시작 자체를 미루게 된다. 혹은 열심히는 하는데 방향이 엉뚱해진다. 노력은 했는데 남는 게 없는 이유다. 더욱이 인공지능 시대라 메타인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인공지능 활용의 시작은 명령어, 다시 말해 질문 입력이다. 좋은 질문을 하려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먼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메타인지가 곧 질문력이다. 학습이 하루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생에겐 특히 더 중요하다. 수학 공부를 예로 들어 보자. 메타인지가 높은 학생은 "이 단원 개념은 아는데 응용이 약하다"처럼 자신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안다. 그래서 모르는 부분, 약한 부분 위주로 공부하고, 시간도 그쪽에 더 쓴다. 남들과 같은 1시간을 공부해도 결과가 다른 이유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팀장이라고 하자. 팀장이라고 모든 영역을 다 잘할 수는 없다. 메타인지가 높은 팀장은 자기 약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 부분은 잘하는 팀원이나 인공
모두가 찬란한 봄의 서막을 노래할 때, 누군가는 그 눈부신 햇살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깊은 그림자를 발견하곤 합니다. 오늘 아침독서편지는 햇빛에서 풍겨오는 낯선 냄새를 따라가며, 상실의 아픔을 외면하는 대신 김혜순 시인의 치열한 시어들로 그 슬픔을 오롯이 통과해보고자 합니다. 꽃이 피어나는 환희보다 더 절박한 마음으로 '봄을 붙잡아두려는' 한 수필가의 내밀한 고백을 통해, 우리 안의 환상통을 어루만지는 고요한 사유의 시간을 나누고 싶습니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교육신문]
유채색을 꿈꾸며 혼자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오래전 추억이 머물렀던 곳으로 가보고 싶습니다.낯선 곳에서 오래 걷고, 낯선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며, 익숙한 일상 밖의 공기가 내 안에 어떤 마음으로 들어올지, 가만히 느껴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다시 색칠해 보고 싶었던 무채색의 어느 날을 떠올려 봅니다. 다시 와 보고 싶었던 스위스의 조용한 시골 마을을 그리며, 문득 스위스 마테호른의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 있습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다시 오고 싶었던 스위스. 마음 속에 늘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던 장면으로 되돌아가 봅니다. 기억 속에 있는 대자연의 위대함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걸어가면 자연의 포근함이 온몸을 감싸줄 것 같습니다.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쁨에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걷던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말씀이 별로 없으셨던 아버지는 꼭 손을 잡고 데리고 다녀주셨습니다. 사랑한다는 단어를 아끼셨던 아버지의 손길은 무언의 표현이었습니다.기쁠 때도,슬플 때도,누군가의 아내로 살게 되는 딸의 손을 잡고, 웨딩홀을 걸어갈 때도 손을 꼬옥 잡아 주셨습니다. 지나간 무채색의 추억, 스쳐 온 인연, 함께 걸어왔던 시간, 추억 속에 기
그냥 쓰기로 했습니다 말을 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 중 당신은 어떤 게 더 편한가요? 예로부터 글이란 아무나 쓰는 건 아니라는 말이 있으니 편하게 하는 말하는 것이 쉬운 것 같기도 하고,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기에 오히려 쓰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 말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칠 수 있는 여유가 조금은 있는 글이 더 편하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막상 써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일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요. 엉켜있는 수많은 생각의 실타래 속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이죠. 좋은 글은 시간 간격을 두고 여러 번의 퇴고를 거쳐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매주 한 편씩 쓰는 글의 마감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주제를 생각하다 결국 마감일이 가까워져서야 의자에 앉게 되죠. 키보드에 손을 얹고 머릿속에서 유영(遊泳)하는 단어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중 하나를 꺼내어 글을 쓰기 시작해보지만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죠.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 오르는 생각들로 정리가 되지 않아 손은 또 그 자리에 멈추고 맙니다. 그렇게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죠.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