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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4 (목)

최홍석 칼럼 - 상처(傷處)

오래 전 시골에 있는 조그만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새로 내부를 단장한 조그만 교회였는데 옹이가 촘촘한 판자로 벽을 두른 예배당에서는 아름다운 무늬와 함께 나무 향이 그윽하게 풍겨왔다. 무척 아늑했다. 잠시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노라니 깨달음이 수묵처럼 스며들었다. 그렇다. 나무의 생채기가 옹이를 만들고 그 옹이에서 향내가 풍겨오듯 내 영혼의 향기는 주로 상처에서 나온다.

 

 

난생 처음 미국을 간다고 어린애 마냥 좋아하던 아내가 보름이 지난 다음 돌아왔다. 그런데 썩 즐거운 표정은 아니었다. 무릎과 손바닥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돌아왔는데 대자연의 장엄함에 절로 무릎이 꿇렸는지 하필이면 이 세상 최고의 절경 가운데 하나라는 그랜드 캐년에서 넘어졌단다. 보름이 지난 지금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면 자칫 응급 구조대를 부를 뻔 했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가 보다. 아무튼 상처 때문에 여행기간 내내 힘들었다고 투덜거리는 아내를 달래다 보니 문득 그 때 보았던 예배당의 옹이가 생각났다.

 

낫에 베인 상처, 운동회 때 넘어진 상처, 거울을 보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갔다가 응급실 신세를 졌던 상처 등 내 몸에도 몇 개의 중요한 상흔들이 있다. 세월이 흐른 다음 아픔은 없고 흔적만 남아 있는 상처들은 이제 내 삶의 역사가 되었다. 흉터마다에서 추억들 하나하나가 생생히 떠올라 자칫 기억도 없었을 그 날들이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어떤 상처는 50년도 더 됐지만 날짜와 시간까지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손가락을 낫에 베인 상처는 초등학교 4학년의 6월 6일 오전 아홉 시 55분경이다. 농번기를 맞아 보리 베기를 하다가 심하게 베었는데 셔츠를 찢어 상처를 싸매고 있노라니 현충일이라 묵념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었다. 근처에 병원도 약국도 없던 터라 아버지 담뱃가루를 붙이고 일을 계속 했다. 그 후로 덧나기를 수차례 고생을 많이 했다. 상처를 볼 때 마다 6월 초의 태양과 넓기만 하던 누런 보리밭, 부모님과 시골집이 떠오른다.

 

턱 밑의 상처는 지금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자국으로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갈 뻔한 사고의 기억이다. 내가 네 살 되던 음력 4월 18일, 생일선물로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하얀 반소매 저고리가 너무 좋아 거울에 비춰보기 위해 어머니 바느질 의자를 딛고 올라섰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목수가 마감을 제대로 하지 않은 못에 목을 따였다. 논둑에서 쑥을 뜯어 지혈을 시키신 할머니 (정작 병원에서는 상처에 들어간 마른 쑥 잎을 제거하느라 배로 힘들었지만), 4살이나 된 나를 들쳐 없고 비포장 왕복 40리 신작로 길을 걸어 병원을 다녀오신 양어머니....그분들이 그립다.

 

육신의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당시에는 지독한 아픔이지만 조금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중요한 삶의 궤적이 되니 일부러 상처를 만들 필요는 없겠지만 운이나 재수가 없었던 자국으로 기억할 필요는 전혀 없다. 더구나 영광의 상처라는 것도 있으니까.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집의 봉창에 난 조그만 구멍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손거울로 햇빛을 천정으로 벽으로 비추며 놀던 기억도 있다. 구멍이 없었으면 빛도 없었을 것이고 황홀한 거울놀이도 없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내 완고한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금이 가지 않았다면 내 속에 빛이 들어와 영혼을 소생시키고 성장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상처들을 보며 지난날들을 추억하듯이 아내는 무릎의 상처를 볼 때마다 그랜드 캐년을 추억할 것이다. 크든 작든 육신의 상처이건 마음의 상처이건 상처를 받을 때 마다 ‘아하! 나는 지금 옹이를 하나 만드는 중이로구나’ 하고 중얼거린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한다.

 


 

▲ 최홍석 칼럼니스트

 

최홍석

전남대학교 국문과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서울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교감 및 교장 정년

 

[대한민국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