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의 탈무드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청각 장애인 두 사람이 길에서 마주쳤다. “여보게, 고기 잡으러 가나?” “아니, 고기 잡으러 가.” “응, 난 고기 잡으러 가는 줄 알았지.” 그리고 둘은 각각 자기 길을 간다. 마치 오늘날 우리의 정치 현실과 국민들의 여론을 보는 것 같다. 모두들 상대의 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자기 말만 한다.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앖는데 상대방이 귀머거리인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그 둘은 또 두 동강이 난다. 한 번은 어떤 사내가 이비인후과 병원에 들렀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실은 내가 아니라 제 아내가 요즘 잘 듣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본인이 오셔야지요.” “그렇기는 한데 워낙 병원을 싫어해서요.” “그럼 댁에 가셔서 부인께서 얼마나 떨어진 거리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못 들으시는지 알아 오십시오.” 사내는 집으로 갔다. 현 관에 들어서니 아내는 주방에서 저녁을 짓고 있었다, “여보, 저녁 메뉴가 뭐야?(11미터)” “......” “저녁 메뉴가 뭐냐고- (7미터)” “....” “저녁 메뉴가 뭐냐니까? (4미터)” “.....” “저녁 메뉴가 뭐냐고 여러 번 물었는데...(2미터) ”
후안 발데스를 아시나요? 콜롬비아 커피 안데스의 능선을 따라 안개가 피어오를 때, 붉게 익어가는 커피 체리들. 부드럽고 깔끔한 콜롬비아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콜롬비아의 햇살이 입안 가득 퍼지는 듯하다. ‘후안 발데스(Juan Valdez)’ 밀짚모자를 쓰고, 수작업으로 정성껏 커피를 재배하며 노새와 함께 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은 콜롬비아 커피 농부의 상징이자, 콜롬비아 커피의 얼굴이 되었다. 이 캐릭터는 단순한 마스코트가 아니라, 전 세계에 콜롬비아 커피의 품질과 철학을 전하기 위한 상징이다. 후안 발데스를 브랜드로 만든 곳은 콜롬비아 전역의 커피 농가를 하나로 잇는 연합, FNC(Federación Nacional de Cafeteros de Colombia), 콜롬비아 커피 생산자 연합이다. 1927년, 중간 상인들의 착취와 가격의 불안정 속에서 생계를 위협받던 농민들은 스스로 뭉쳤다. “커피 농가의 삶의 질을 높이고, 세계 최고 품질의 커피를 생산하게 하자.” 그 다짐은 조직의 신념이 되었고, FNC는 그렇게 태어났다. 오늘날 FNC는 50만 명 이상의 커피 농가가 소속된 거대한 공동체다. 품질 관리, 가격 안정화, 농가 교육, 연구소 운영,
있는 그대로, 커피 좋은 사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논리보다 마음이 먼저 알아채는 ‘촉’ 이란 감정으로 알 수 있을까? 일상에서 촉으로 불리는 “육감(六感)”은,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직감에 해당한다. 이 감각은 진짜 감각일까? 아니면 한순간 스쳐가는 사념(思念)일까? 분석이나 논리를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판단, 즉 인간의 인지 기능 중 하나로 심리학에서는 이를 직관(intuition)으로 이해한다. 과학적 관점에서 육감은 인간의 뇌가 오감 외에도 내장 감각, 균형 감각, 온도, 통증 등 다양한 감지 시스템을 종합해 판단을 내리는 복합적 결과로 본다. 말하자면, 육감은 우리 몸 전체의 기억과 경험이 만든 응축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개강 첫날, 자리에 앉은 수강생들을 바라보며 나의 시각과 육감이 분주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표정, 옷차림, 눈빛, 보이지 않는 기류까지 읽기 위해 나의 감각들은 바삐 움직인다. 시선과 생각의 바쁨을 멈추고, 차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질문해 본다. “어떤 커피 좋아하세요?” “고소한 커피요.” “산미가 있는 커피요.” 돌아온 답에 다시 묻는다. “좋은 커피는 어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가졌으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미모가 출중했고 왕비였다. 그런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손거울이었다. 그녀는 거울에게 수시로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고 바로 ‘당신’이라는 대답을 들어야만 안도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당신이라는 대답 대신 ‘백설 공주’라는 거울의 대답은 그녀를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빠뜨렸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백설 공주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번민의 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생을 보낸다. 손거울이 문제였을까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문제였을까. 나에게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 좀 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대다수의 것으로 많이 가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무언가의 결핍은 지난(至難)한 삶을 더욱 공허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물질의 결핍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결핍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결핍된 영혼은 물질로 채울 수 없으며 설사 많은 물질이 주어진다 해도 행복을 안겨주진 않는다. 장례식에서 슬픈 울음이 나는 곳은 가난한 집이고 고성이 들리는 집은 부잣집이라는 씁쓸한 이야기가 있다. 고인
‘악마는 특별하지 않다. 단지 ‘무사유(無思惟)'할 뿐이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악명 높았던 전범(戰犯)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렸다. 그는 600백만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내 처형을 한 책임자였고 독일 패망과 동시에 아르헨티나로 도망하여 15년을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살았지만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끈질긴 추적과 장남의 철없는 누설 끝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재판과정을 생중계했고 전 세계인이 숨을 죽이며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다. 한편 이 소식을 듣고 대학교수였던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으로 날아가 재판 과정을 취재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의 책에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부제를 덧붙여서 펴냈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유대인 600만 명을 ‘처리’하기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에 앞장섰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성인 남성처럼 보였다. 이웃과 가족에게 친절했으며, 풍채 또한 상상과는 달리 왜소한 편이었다. 그는 아이에게는 바람직한 아버지였고, 아내에게는 바람직한 남편이었으며, 아웃
요즘 우리 일상에서 전자우편(이하, 메일)이 주요 의사소통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업무상으로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바로 확인되는 문자나 카톡보다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어느 정도 심적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메일의 장점으로 여겨진다. 한편, 메일은 ‘전자우편, 전자편지’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편지’이다 보니 격식을 차려야 한다는 약간의 부담은 있다. 그래서 오늘 글을 비롯하여 앞으로 몇 차례 (업무) 메일 쓰기의 표현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먼저, 메일도 편지인지라 흔히 손편지라고 하는 편지의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두-인사-본문-끝인사-보내는 사람 이름’ 순으로 진행된다. 오늘 먼저 ‘첫인사하기’와 ‘보내는 사람 이름 쓰기’를 살펴보자. 첫인사는 대개 ‘안녕하세요’나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는데, 둘 다 쓸 수 있는 표현이다. 다만, ‘안녕하세요’는 비격식체이고, ‘안녕하십니까’는 격식체이다. 비격식체는 표현이 부드럽고 주관적인 느낌을 주고, 격식체는 의례적으로 쓰고 직접적, 단정적, 객관적인 느낌을 준다. 그래서 상대방과의 친소 관계(親疏關係)나 상황을 고려해서 쓰면 된다. 그다음으로 많이들 궁금해하는 것이 ‘안녕하세요’나 ‘
얼마 전 지인을 만나러 전남 장흥을 다녀왔다. 지인의 안내로 점심을 먹으러 한 식당을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쌀쌀한 날씨임에도 한참을 밖에서 기다린 후에야 가까스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식사 중, 손님이 넘쳐나는 걸 보니 유명한 식당인가 보다고 했더니 대답하기를 지금은 손님이 많이 떨어졌지만 여기보다 더 붐비던 식당이 근처에 있단다. 그래서 왜 손님이 줄었는지 혹 주인이 바뀌었는지 물으니 주인이 바뀌지는 않았는데 너무 불친절한 것이 원인이란다. 순간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인이 처음부터 불친절했다면 애초부터 손님이 넘쳐나지 않았을 텐데 필시 장사가 잘 되니 주인의 태도가 바뀌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편 내가 아는 식당 생각도 났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식당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인이 나이도 들고 건강이 여의치 않아 운영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듣자 한 사람이 재빨리 인수를 했다. 그러나 손님이 서서히 줄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식당은 주인이 또 바뀌었다. 실패한 연유를 주인만 모르고 다른 이들은 알고 있다. 이전 주인은 새벽시장을 가서 최고의 식자재를 구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그날의 음식은 절대로 다음 날 다시 나오는 법
민수(가명)라는 아이와 속엣 말을 하기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너는 장래 희망이 무엇이야?” “경찰이요.” “아, 그래. 특별히 경찰이 되고 싶은 이유가 있느냐?” “아버지를 잡아 가둘 거요.” “.....” 아이는 이마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이마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학원을 안 갔다고 골프채로 맞아 이마가 쪼개지다시피 한 흉터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맞은 기억만 있다고 했다. 민수는 내가 만난 아이들 중에 드물게 보는 힘든 아이였다. 담임과 상담교사와 교감을 거쳐 나한테까지 왔다. 부모에 대한 강한 증오와 열등감으로 뒤틀려 있었고 외모 콤플렉스로 사시사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는 코로나 팬데믹이 있기 전이었다.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력감뿐이었고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아 모든 선생님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실은 내가 동의하면 자퇴를 하는 수순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무동력선을 보는 듯 했다. 나는 민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네가 너무 힘들어하니 하루에 한 시간은 아무 조건 없이 내 방에 와서 쉬게 해주마. 내가 교과 선생님께는 상담을 한다고 해 줄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영어도 수학도 아니고 그저
쿨링 - 멈추어야 할 때 “아직 부족해요. 충분하지 않아요.” 시험을 앞두고 긴장과 불안에 여유가 사라진 수강생들의 표정 사이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이 멈춘다. ‘부족’이라는 단어 앞에 나 역시 조용히 서서 그들을 바라본다. 늘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 조금 더 노력하면, 더 오래 참고 버티면, 더 많이 이해하면, 모든 것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성취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당연하고, 늘 그래야만 한다는 전제처럼 따라붙는다. 하지만 언제까지 노력해야 하는지, 얼마나 오래 참아야 하는지, 어디까지 더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더 해야 한다’는 말은 넘치지만,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는 말은 좀처럼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지나치게 버티고, 지나치게 이해하려 노력하며 결국 스스로를 태워버린다. 꼭 배출할 시점을 결정하지 못해 로스터기 안에서 뜨거운 열기에 태워지는 생두처럼... ‘멈춤’ 역시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자주 잊는 나에게 커피는 항상 조용히 말한다. “멈춰야 할
케냐 커피의 산미 – 취향의 경계를 넘어보다 “여러분은 산미가 강한 커피를 좋아하세요?” 커피 향기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마다의 ‘호(好)’와 ‘불호(不好)’를 잠시 접어두고 객관적으로 향미를 평가하는 방법을 배우는 센서리 수업. 나는 불호에서 호가 된 케냐 커피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색함이란 이름에서 친근함이란 느낌에 매력까지. 그렇게 스며든 나만의 ‘케냐 이야기’를 조심스레 시작해본다. 커피의 향미를 알기 전, 처음 만났던 그의 맛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한 신맛이 뜨거운 커피의 온기와 함께 입안에 전해지는 순간, 한 모금을 삼키기도 쉽지 않았다. 뱉어낼 수도, 삼켜버릴 수도 없는 난감하고 낯선 첫 만남에 애먼 커피잔만 바라보며 다시 마셔야 할지 망설였던 기억. 아무리 커피를 잘 아는 사장님의 추천 커피라지만, 케냐 커피는 ‘불호(不好)’ 그 자체였다. 커피 한 잔을 다 비우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던 첫 만남의 기억. 케냐 커피의 강한 산미는 생두 감별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해발 1,500~2,100m의 고지대에서 재배되기에 당분과 유기산의 함량이 놓고, 밝고 복합적인 산미가 만들어진다. 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