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교정에 들어서면 짙은 나무그늘이 먼저 반겨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교정의 나뭇가지들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다. 어느덧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이 되자, 늘 활기찼던 학교도 서서히 긴장이 풀리듯 조용히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점심시간이 지나고 매점 앞에 진을 친 학생들을 볼 때면, 한창 먹고 싶은 게 많고 식욕도 왕성한 아이들의 생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나의 여고 시절이 불쑥 소환된다. 학교급식이 없던 그 시절, 우리는 매일 도시락을 최소 두 개씩은 싸서 다녀야 했다. 점심 도시락은 당연하다는 듯 3교시가 끝나기가 무섭게 까먹기 바빴고, 저녁용으로 싸 온 도시락마저 오후 3시쯤 출출해지면 이미 뱃속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러니 야간 자율학습(야자)이 시작되기 전, 다시 매점으로 몰려가 컵라면을 먹는 일은 흔한 일상이었다. 가방 안에서 김치통 국물이 쏟아져 내내 김치 냄새가 진동하던 교실 풍경은, 요즘 아이들에게는 너무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용돈이 넉넉지 않아 어떤 날은 둥글고 커다란 '보름달빵' 하나로 저녁을 대신하기도 했다. 거기에 바나나우유 하나를 곁들이면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이 불변할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TV 속 광고만 보아도 그렇다. 마치 이걸 마시면 지금의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더 많은 소유가 변치 않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젊음은 영원하지 않고, 내가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모든 것도 흘러가고, 지나간다. 변치 않는 하나의 진리는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물은 흘러야 한다. 물이 흐르지 않고 한곳에 고여있으면 썩는다. 생각과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삶을 살다 보면 마주하기 힘든 생각과 감정들을 겪는다. 그러나 삶의 어려움을 겪는 순간들은 이러한 불청객이 찾아왔을 때가 아니라 내면의 생각과 감정들을 억누르고 회피하느라 고군분투할 때 찾아온다. 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을 때 더 강하게 압도되었던 경험이 있는가?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고억제의 역설적 효과이다. 억제하고 회피할수록 당장의 불안은 낮아지지만, 결국 떠올리고 싶지 않은 대상이 강해지는데 먹이를 주게 된다. 회피나 통제는 우리의 마음을 그 자리에 고여있게 만든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놓치게 되는 삶의 소중한 순간들은 점차 회색빛이 되어간
필자는 지금도 학창 시절 국사 교과서를 생각하면 맨 첫 장을 장식하던 부스스한 머리에 가죽옷을 걸치고 돌도끼를 든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원시인들이 먼저 떠오른다. 뗀석기와 간석기의 미묘한 차이를 외우고, 빗살무늬토기의 빗금 방향을 심각하게 분석하다 보면 어느새 3월이 다 가곤 했었다. 이 시대에 그때 상황을 다시 생각하면 마치 판타지 만화처럼 아득하고 실감 나지 않는 고대사 영역에서 온 힘을 다 빼고 나면, 정작 우리가 두 눈으로 목격하고 발을 딛고 서 있는 근현대사에 도달할 때쯤엔 시간이 모자랐다. 학기 말 진도 빼기에 급급해 수박 겉핥기로 넘어가거나, “여기는 시험에 잘 안 나오니 읽어만 봐라” 하는 패스 구간이 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마주한 근현대사는 외세의 침략과 굴욕, 혼란으로만 가득 차 있어, 학생들에게 깊이 있는 역사적 사유를 교육하기보다 막연하고 수치스러운 민족 감정만 자극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역사는 멀고 아득한 유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나침반이어야 하는데, 우리의 역사 교과서는 오랫동안 그 나침반의 바늘을 고대 유적지에 집중해 묶어두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혹이 들 때가 많다. 최근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는 중학교
언제부턴가 대한민국 교육계를 지배해 온 가장 익숙하고도 아름다운 비유는 단연 ‘마중물’이었다. 펌프질을 할 때 위에서 붓는 한 바가지의 물처럼, 교육은 아이들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중물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는 참으로 따뜻하고 헌신적인 교육관이라 할 수 있다. 교사는 마중물이 되어 자신을 기꺼이 던지고, 그 자극을 받아 아이들은 메마른 파이프 속에서 지하수를 끌어 올린다는 화두는 오랜 세월 공교육의 이념적 버팀목이 되어왔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실시간으로 대체하고 생성형 AI가 정답을 0.1초 단위로 쏟아내는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에 이 마중물 패러다임은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한 바가지의 마중물로 해결될 수 있는 단순한 펌프가 아니다. 기후 위기, 경제적 양극화, 공동체 붕괴 등 예측 불허의 파도가 밀려오는 거친 황무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교육은 누군가 부어주는 한 바가지의 물에 의존하는 유약한 ‘마중물 교육’을 과감히 끝내야 한다. 대신 아이들이 삶의 어떤 척박한 순간에서도 스스로 땅을 깊게 파 내려가 끊임없이 신선한 지혜
학교 수업 시간에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국가적 스포츠 이벤트를 단체로 시청하는 것은 과거부터 교육 현장의 해묵은 논쟁거리다. 특히 2026년 북중미 월드컵은 한국 대표팀의 주요 경기가 정규 수업 시간과 완전히 겹치는 데다, 기말고사 기간과 맞물리는 최악의 타이밍이 형성되면서 시청 여부를 둘러싸고 일선 학교 현장에 큰 혼란이 일었다. 이에 교육부는 월드컵 시청을 교육과정과 연계한 수업 운영으로 볼 수 있다며, 허용 여부를 전적으로 학교와 교사의 재량에 맡긴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렇듯 결정 주체가 모호한 상황 속에서 학교 현장의 대응과 그에 따른 결과는 천차만별이었다. 경기 A 중학교처럼 학생들의 월드컵 시청 요구에 따라 교직원 협의 및 학부모회 동의를 선제적으로 구하고, 수행평가 일정을 조정하는 등 철저한 사전 준비를 거쳐 원활하게 월드컵 경기 단체 시청을 진행한 학교도 있었지만, 모든 학교가 이처럼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경북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일부 학급의 월드컵 시청을 학교 측이 제지하자, 학생들이 이를 '공동체 의식을 배우는 살아있는 교육'이라 주장하며 성명서를 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는 학생들의 높아진 권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
2026년 북중미 월드컵이 막을 내렸다. 월드컵에 출전한 우리나라 선수들이 보여준 최악의 경기가 큰 충격이었던 만큼이나, 교육 현장에서도 학교 수업 시간 내 월드컵 시청 여부를 둘러싸고 큰 논란이 일었다. 수업 시간 중 월드컵 시청에 대해 ‘살아있는 교육’이라며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학습권 침해'로 보는 부정적 시각이 팽팽하게 맞섰다. ● ‘살아있는 교육’ vs ‘학습권’ 사이 길 잃은 교육 현장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국가적인 대형 스포츠 행사를 다 같이 즐기는 것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교육적, 정서적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학교 현장에서는 관련 교과와 연계하여 개최국의 문화 이해 및 스포츠 정신을 배우는 유연한 교육과정 운영이 가능하며, 이러한 거대한 사회적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있는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학교의 본질적 목적이 정해진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며, 이를 심각한 ‘학습권 침해’로 규정한다. 임의로 수업을 스포츠 중계로 대체하면 이를 보충해야 하는 행정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 ● 담임 교사의 단독 결정이 어려운 이유 이런 첨예한 쟁점 속에서 교육 당국이나 학교 차원의 명확한 지침
인연에도 우선 순위가 있음을 요즘 잊어버리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바쁜 일정으로 가득했던 하루, 그런 어떤 날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예전 할머니가 까마귀 고기를 먹었냐고 했듯, 약속했던 약속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를 자책할 시간도 없이, 먼저 전화기부터 찾게 됩니다. 누구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하는지 말이지요. 미안함을 전할 사람에게 우선순위가 생깁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바로 전화 드렸어야 했는데 날짜를 잘못 확인했네요.”급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 마음을 전해보기도 합니다. 진심을 담아 최대한 공손하게 전하고 공적인 일인지라 이야기는 짧게 끝이 납니다. 문득 전화기에 저장된 연락처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전화를 자꾸 미루게 되는, 마음이 불편해진 인연들은 연락처도 조금씩 정리해나가는 일이 생깁니다. 다음에 해야지,내일 해야지, 저녁에는 꼭 해야지,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흐릅니다. 반년이 지나가면 전화를 거는 일 자체가 두려워지고 어느 순간부터 한 번의 전화마저 망설이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인연의 끈은 점점 짧아져 가고 이 또한 어쩔 수 없을 운명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해집니다.
그날 음료가 유난히 시원했던 이유 ‘아, 시원하다. 정말 맛있다!’ 분명 처음 마셔보는 음료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목으로 내려가는 시원한 맛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혈관을 따라 몸 구석구석 전해지는 청량함이 나를 가볍게 들어 올린다. 동시에 밀려오는 뿌듯함과 벅차오름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속으로 나를 빠져들게 만든다. 처음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인 줄 알았다. 러너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다는 행복한 감정. 격렬한 운동이나 장거리 달리기 등 고강도의 신체활동을 지속할 때 일시적으로 행복감 또는 도취감과 함께 불안감이 줄어들고 통증 감각이 둔해지는 현상이라 위키피디아에서는 정의하고 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 맞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자료를 찾아보니 러너스 하이는 운동 중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달린 후 나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해냈다’는 성취감과 ‘운동’이 주는 행복감이 함께 만든 작품이 아니었을까? 달리기를 시작한 지 2년이 되어 간다. 처음엔 건강을 생각해서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이젠 또 다른 목표까지 생기게 되었다. 하반기 하프 마라톤에 출전하는 것이다. 하프 마라톤 거리는 21km, 완주하기
고대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의 행렬 뒤에 포로가 된 노예를 세워 “죽음을 기억하라”고 외치게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누리는 영광이 영원하지 않으며, 인간의 운명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인간의 영화가 길지 못하고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성공이든 실패든 그것이 마치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때 잊지 않으려는 그 처사는 현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멸망했음은 망각하고 말았기 때문이고 결국은 망각하고 마는 것이 인간의 슬픈 운명이다. 어느 날 페르시아의 한 왕이 신하들에게 마음이 슬플 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드는 물건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그 또한 삶의 균형감각을 잃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하들은 밤새 모여앉아 토론한 끝에 마침내 반지 하나를 왕에게 바쳤다. 왕은 반지에 적힌 글귀를 읽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만족해했다. 반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유대인의 지혜서 미드라쉬에는 이 반지가 다윗왕의 반지라고 쓰여 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궁중의 우두머리 보석 세공인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나를 위하여 반지 하나를 만들어라! 거기에 내가 매우 큰 승리를
“얘야, ‘사(士)’ 자 들어가는 직업을 가져야 평생이 편하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하던 소리다. 판사, 검사, 의사, 약사…. 하지만 2026년 현재, 대한민국 입시 지형과 교육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새로운 ‘사’자 돌림 직업이 등장했다. 바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입사한 ‘기술 전사(戰士)’들이다. 최근 서울경제(2026년 7월 11일 자)에 보도된 “대학 진학보다 삼전닉스”라는 기사는 현재 대한민국 교육계가 마주한 거대한 지각변동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서울’ 대학 명문대 간판을 따기 위해 재수, 삼수를 불사하며 청춘을 갈아 넣던 시대는 가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한민국 최첨단 산업의 중추로 곧장 뛰어드는 실속파 영재들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올라선 것이다. 그 변화의 태풍의 눈에 바로 ‘반도체 마이스터고’가 있다. 지난 2026년 6월 26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례적으로 대한민국 충청북도 음성군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를 집중 조명했다. 중국의 관영 CCTV 역시 카메라를 들고 이 학교의 교정을 누볐다. 전 세계 외신들의 눈을 사로잡은 주인공은 바로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