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캐나다 또는 호주 등의 규모에 비하면 결코 크다고 할 수 없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례(前例)를 찾기 힘든 산불이 한반도의 동쪽을 열흘 넘게 살랐다. 뉴스를 통해 보는 장면은 흡사 재난 영화 같았다. 재앙에 처했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위태로움을 나타내는 말로 ‘누란지위(累卵之危)’니 ‘백척간두(百尺竿頭)’니 하는 말이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 경제 안보 질병 자연재해 등 어느 것 하나 위태롭지 않은 것이 없다. 대통령은 탄핵의 위기에 놓여 있으며 정치계는 안개 속에서 연일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하고 있다. 그 사이에 경제는 끝 모를 추락을 하고 있으며 파산이 줄을 잇고 있다. 의료대란으로 일 년 가까이 국민들이 신음하고 있으나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안보도 걱정이 된다. 거기에다 사람이나 가축들이나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 날씨가 풀리면 미세먼지는 얼마나 우리를 괴롭힐 것인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지난여름의 폭염이 올해는 어떠한 기록으로 찾아올지, 우리에게 아름다운 봄이 있었다는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국제 사회도 어려움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엊그제 미얀마에서 진도 7.7의 강진이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고 그
스모키한 향기 속에 숨겨진 시간들 “강사님! 오늘 너무 추워요!”라며, 몸을 잔뜩 움츠리고 강의실로 들어서는 수강생, “오늘 날씨 너무 춥죠? 어제도 추웠는데 오늘도 춥네요. 우리 따뜻한 드립커피 한 잔 마시고 시작할까요?” 라는 질문에 “좋아요.”라는 답이 이어진다. 엊그제 로스팅한 과테말라 원두를 그라인딩한다. 분쇄된 원두가루에서 스모키한 향이 퍼지고, 뜨거운 물이 원두가루를 적시며 과테말라 커피가 서버에 담기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3월의 추위, 주말 아침을 움츠리며 학원으로 왔을 수강생들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에 공감이란 마음을 녹여 정성스레 물을 부어준다. 스모키한 향에 18세기 후반 과테말라 커피 역사의 시작이 코끝을 스치듯 다가온다. 오늘날 전 세계인들에게 스모키한 향과 묵직한 바디로 사랑받는, 스페인 식민지 수도원 정원에 재배되던 작은 커피나무가 과테말라 전체를 대표하는 산업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과테말라의 커피는 18세기 후반, 예수회 수도원의 정원에서 관상용, 약용으로 재배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과테말라 고지대의 기후와 토양이 커피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9세기 중반 본격적으로 재배가 확산되며 상품 작물로 전환되었다.
사람에게는 ‘로서’, 사물에는 ‘로써’를 쓴다는 생각을 지우면, 잘 쓸 수 있어요 맞춤법과 문법에 맞는 표기, 표현을 통달(洞達)한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든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일은 어쩌면 어떤 언어 사용자에게든 가능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말과 글을 잘 써 보겠다는 마음가짐, 그에 따른 행동(노력)만 있어도 최선의 경지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올초 어느 대학교의 대학생, 대학원생 대상으로 맞춤법, 문법 강의를 했다. 그 학교의 이름을 생각하면, 그 학생들은 맞춤법, 문법 지식을, 그것도 꽤 높은 수준으로 갖추고 있으리라 예상되는 경우였다. 그런데 요구 사항을 미리 파악해 두면 강의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실시한 사전 조사의 결과를 전달받고는 적이 놀랐다. 강사인 나에게 묻고 요청하는 내용들 중에서 많은 분량이, 맞춤법과 문법에 맞게 잘 쓰고 싶다는 열망, 그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끊임없이 우리 말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그러한 태도는 강의를 준비하는 나를 분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오늘 ‘우리 말글 잘 써 보기’의 하나로서, 한글 맞춤법 제57항에서 다룬 ‘구별하여 적는 말’을 살펴보자. 이 규정에서는 ‘걷잡다/겉잡
디카페인,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주다 커피가 인연이 되어 만난 사람들, 같은 하루 다른 시간대에 사는 나를 그들에게 맞추기 위해 연차를 내고 카페로 향한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마음이 계단을 한걸음에 오르게 만든다. 성큼성큼 걸어 카페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반가운 그들이 멀리서 보인다. 오늘은 강사가 아닌 인생의 선후배로서 서로 둥근 테이블에 마주 앉아 삶의 향미를 나누려 한다. 가벼운 안부를 나누고 커피를 주문한다. 여러 메뉴 중 디카페인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나라 생두인지 정보가 쓰여 있는 다른 커피들 사이에 아무런 정보 없이 덩그러니 혼자 있는 네 글자. ‘디카페인’ “디카페인 따뜻하게 주세요.”라고 주문을 하니 “선생님! 디카페인 커피 드실 거에요?”하고 의아한 듯 묻는다. “네, 오늘은 이 아이를 알아보고 싶어요.”라고 웃으며 대답을 한다. 디카페인 커피는 생두에서 카페인 성분을 일정 부분 제거한 커피를 의미한다. 카페인 성분을 전부 제거한 것이 아닌 카페인 함량을 줄여 그 성분이 소량인 커피를 디카페인 커피라고 한다. 디카페인 커피에 대한 기준은 국가마다 상이하다. 미국의 식품의약국(FDA)에서는 카페
나에게 선물한 건 바로 기다림, 그리고 더치커피 하고 싶은 일에 온전히 시간을 쓸 수 있는 휴일. 나에게 어떤 시간을 선물할까 잠시 고민한다. 고민을 끝내고 과테말라 원두를 그라인딩 한다. 분쇄된 원두가루 위로 물이 조금씩 떨어지도록 더치커피 추출도구의 밸브를 조절한다. “기다림” 커피의 시간이 멈춘 듯한 휴일 아침, 나에게 선물한 건 기다림이다. 버튼을 누르면 10초 이내에 추출이 시작되는 에스프레소, 물을 붓기 시작하면 몇 초 이내에 서버 안으로 커피가 추출되기 시작하는 핸드드립 커피와는 다른 더치커피, 오늘은 느림의 미학이 맛에 숨겨져 있는 더치커피를 나에게 선물하려 한다. 더치커피(Dutch Coffee, Cold Drip Coffee)는 ‘네덜란드식 커피’라는 의미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17세기 인도네시아에서 커피를 대량으로 생산한 후, 유럽으로 수출하는 과정에서 생긴 추출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으로 가는 긴 항해 동안, 커피를 끓여 보관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차가운 물로 천천히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이 개발된 것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차가운 물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할 경우, 무더운 기후에도 보관이 쉽고, 항해의 긴 시간 동안 커피
최고의 선물, 우롱차와 커피 그 사이 커피를 하면서 나는 나름의 지론이 있다. 한 달이란 기간이 있다면, 일주일 정도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 기간을 두어 혀에 닿는 음식과 음료의 자극을 줄이려 노력한다. 햇빛이 방 안 깊숙이 들어오는 휴일 오후, 책상 위 노트북을 펼치고 습관처럼 원두 봉투로 향하던 손이 멈춘다. 며칠 전 지인에게 받은 차로 눈길이 향한다. 알록달록 고운 티백들 사이에서 우롱차 티백을 하나 집어 든다. 눈으로 읽힌 단어를 소리로 바꾸어 본다. “우롱티.” 장난을 치듯 티백을 보며 “우롱? 뭘 우롱 허니?”하고 말하며 뒷면을 살핀다. 90°C의 물에 2분간 우리라는 추출 가이드가 적혀 있다. 차를 우리려 드립포트에 물을 받는다. 투명하게 드립포트 안을 채워가는 물을 보니 노자의 『도덕경』 한 구절이 떠오른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 그래서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면서도 다툼이 없으며, 담기는 그릇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는 물. 오늘은 그러한 물과 같은 우롱차 한 잔을 우리려 한다. 우롱차는 발효 정도에 따라 다양한 풍미를 갖는 차이다. 부분 발효(
에스프레소를 닮은 말 3월이 얼마 남지 않은 2월, 얼굴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는 여전히 겨울의 끝자락에 머무른듯하다. 두꺼운 겨울 외투 호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고, 고개를 푹 숙여 옷깃 속에 얼굴을 파묻고 걷는다. 호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진동한다. 때마침 도착한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한다. 문장 속 마침표와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오늘은 꼭 택시타고 출근해요. 몸 안 좋을 때 무리하지 말고 추운데 따뜻하게 가요.” 약을 먹어도 가라앉지 않는 열과 기침에 모든 게 버겁게 느껴지던 주말 아침 출근길. 아프다는 말에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고 걱정하던 분, 택시비와 함께 온기를 전해주는 듯한 따스한 말에 코끝은 찡해진다. 그리고 눈물이 뚝 떨어진다. 그의 말은 그가 평소 즐겨 마시는 에스프레소와 닮아 있다. 적당한 압력과 시간으로 부드러운 크레마층 아래 가둬둔 은은한 향기와 깊은 단맛이 있는 따뜻한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에서만 볼 수 있는 크레마(Crema)층은 이산화탄소(CO₂), 지방, 단백질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갈색의 거품층이다. 생두가 로스팅되면 원두 안에 이산화탄소가 생기게 되고, 원두 안에 있던 이산화탄소가
버킷 리스트 삶은 경험해 본 것과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나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최근 본 영상에서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 버킷리스트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우리 저녁엔 치킨 시켜 먹을까?”하는 약속을 하고 출근했던 가족이 불의의 사고로 그날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세상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삶은 살아가야 한다는 사연자의 말은 마음 한편에 큰 울림을 주었다. 보통 버킷 리스트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것들을 정리하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지만, 영상 속 이야기의 울림은,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삶의 태도로 이어졌다. 그리움이 가득한 삶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있다는 메세지는 이미 버킷 리스트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루하루 삶이 꿈이고 순간순간 숨 쉬는 일이 기적이고 내가 누구를 그리워하고 누군가 나를 생각함이 이미 버킷 리스트 그것인데 어찌 또 버킷 리스트가 있을까요? ‘버킷 리스트’ 나태주 시인의 시로 쓴 버킷 리스트의 내용 중에서 특히, ‘하루하루 삶이 꿈’이라는 구절이
웃기게 살고 싶어! 아주 오래전, 누군가 어떻게 살고 싶냐는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그때 나는 망설임 없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난 웃기게 살고 싶어요.” ‘웃기게’란 말이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 다른 누군가를 웃게 만들고 싶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삶을 대하는 내 태도가 너무 진지하고 무겁지 않게, 어쩌면 희극처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의미였을까?. 그때는 막연히 ‘웃기게 살고 싶다.’라는 한 문장이 나의 머리에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웃으며 살고 싶다고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웃으며’가 아니라 난 웃기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그럼 웃음은 저절로 따라오지 않을까? 그 후로 다시 누군가와 그런 얘기를 해 본 적도 없었지만, 가끔 나는 ‘웃기게 살고 싶다.’라는 그 말을 생각한다. 동사 ‘웃기다’는 ‘누군가를 웃게 만들다’라는 뜻도 있지만, ‘한심하고 기가 막히게 보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웃기고 싶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었다. 또한, 누군가에겐 자칫 어설퍼 보이고 부족해 보여 답답하게 느껴질 테지만, 내가 바라보는 이 삶이 엉성해서 더 좋았다. 여기저기 빈 구석이 많은
커피를 닮은 뱅쇼 차가운 겨울바람이 잠잠해지자 독감은 아닐지라도 감기에 걸리는 수강생들이 늘었다. 커피의 향미를 느끼고 표현해야 하는 수업, “콜록, 콜록” 기침을 하는 수강생들이 코가 막혀 향이 느껴지지 않고, 어떤 맛인지 알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후각과 미각을 이용해 커피를 해석해야 하는 수업에서 코가 막혀 향과 맛이 느껴지지 않으니 그 답답함이 어떠할지 헤아려진다. 느껴진 향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목소리 대신 간간이 들려오는 기침 소리에 오늘은 커피보다 따뜻한 뱅쇼 한 잔을 건네주고 싶은 날이다. 뱅쇼(Vin Chaud)는 프랑스어로 ‘따뜻한 와인’이라는 의미가 있는 음료이다. 중세 유럽 귀족들이 와인에 정향, 계피와 같은 향신료를 넣어 겨울에 따뜻하게 데워 마시는 음료였다. 이러한 음료가 프랑스에서 레드와인에 오렌지, 레몬과 같은 과일들, 계피, 정향 같은 향신료, 설탕이나 꿀을 넣어 끓이는 방식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뱅쇼가 되었다. 레드와인은 혈액순환을 돕고, 계피와 정향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어 겨울철 감기 예방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인의 재료가 되는 포도는 커피에서도 자주 쓰이는 플래이버 노트(flavor 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