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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3 (일)

최홍석 칼럼 - 황소와 선착순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 그때 일을 생각하며 고소(苦笑)를 짓지만 상당 기간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얼굴이 뜨뜻했던 사건이 있다.

 

아주 오래 전 교직에 첫발을 디뎠던 때, 군을 제대한 것이 엊그제이고 대학을 갓 졸업했던 때, 그래서 의욕이 넘치고 마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던 그 때, 고1 담임을 했었다. 학교에서는 해마다 의례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주말 캠핑을 가곤 했는데 그해에도 어김없이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으로 캠핑을 떠났다.

 

배낭을 비롯한 개인 짐들이 많고 캠프파이어용 화목도 챙기고 하다 보니 짐차가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줄 간식용 수박을 사서 남학생들에게 한 덩이씩 맡기며 조심해서 가져오도록 했다. 그러나 불과 한 시간 남짓 이동하는 동안 차가 흔들릴 때마다 아이들은 과장된 행동을 하며 일부러 깨뜨려 먹어버리곤 했다. 아무리 엄포를 놓아도 모처럼 학교 울타리를 벗어난 아이들은 영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순식간에 서너 통의 수박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군기를 잡아야만 2박 3일이 순조로울 것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집합을 시키고 캠프파이어용 장작더미에서 몽둥이를 꺼내어 들고 군대식으로 벌을 주기 시작했다. 뜀뛰기도 시키고 이것저것 벌을 주다가 선착순을 시키려고 목표물을 찾았으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삼각주라 나무 한 그루 말뚝 하나가 없었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멀리서 느긋하게 오수를 즐기고 있는 황소뿐이었다.

“황소를 좌에서 우로 돌아 선착순 1명!”

 

 

말이 떨어지자 혼비백산한 아이들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달렸고 놀란 황소는 날뛰다가 말뚝을 뽑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적당히 그 자리를 돌고 왔으면 좋았으련만 긴장한 아이들은 계속 황소를 돌기 위해 뒤를 쫓았고, 좁은 섬 안에서 빙빙 돌던 황소는 급기야 강물로 뛰어들었다. 곧 이어 황소 주인이 쫓아오고 나는 손이 발 되도록 비느라 진땀을 흘렸다.

 

생각해 보면 이 야단이 난 것은 교사인 내가 아이들에게 잘못된 목표를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어리석은 담임을 닮지 않고 아이들은 잘 성장하여 목사로 의사로 또는 내 뒤를 이어 교사가 된 아이도 있고 회사원으로 엔지니어 등으로 훌륭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지만 나는 그 때 일이 늘 부끄럽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크고 작은 선택 앞에서 자문(自問)을 하곤 했다. ‘내가 제시하는 목표는 바른가?’ ‘혹시 나의 아집은 아닌가?’

 

시시때때로 유동하는 것, 시류(時流)에 따라 변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유행도 그렇고 이론이나 학설도 그렇다. 그것들은 황소와 같아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한자성어를 통해 경계했다. 따라서 내가 알고 있는 것, 나의 상식이나 나의 경험 또한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인 내가 아이들에게 그릇된 방향을 제시하여 아이들을 당혹스럽게 한 일이 숱하게 많았을 것이다.

 

또한 아이들의 성장을 저해하는 폐단 중 하나는 어른들의 자기 과신(過信)이다. 어른들이 길라잡이의 역할을 벗어나 전능자처럼 군림하거나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자신의 기준에 맞춰 아이들을 재단(裁斷)하고 억압할 때 아이들은 위축되고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망치이면 모든 것을 못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아직도 어른들의 손에 들려 있는 망치는 무엇인가.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어른들의 시각에서 아이들을 보는 것이다.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제라도 망치를 내려놓고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中-

 

 

최홍석

전남대학교 국문과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서울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교감 및 교장 정년

 

[대한민국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