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사(士)’ 자 들어가는 직업을 가져야 평생이 편하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하던 소리다. 판사, 검사, 의사, 약사…. 하지만 2026년 현재, 대한민국 입시 지형과 교육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새로운 ‘사’자 돌림 직업이 등장했다. 바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입사한 ‘기술 전사(戰士)’들이다. 최근 서울경제(2026년 7월 11일 자)에 보도된 “대학 진학보다 삼전닉스”라는 기사는 현재 대한민국 교육계가 마주한 거대한 지각변동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서울’ 대학 명문대 간판을 따기 위해 재수, 삼수를 불사하며 청춘을 갈아 넣던 시대는 가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한민국 최첨단 산업의 중추로 곧장 뛰어드는 실속파 영재들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올라선 것이다. 그 변화의 태풍의 눈에 바로 ‘반도체 마이스터고’가 있다. 지난 2026년 6월 26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례적으로 대한민국 충청북도 음성군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를 집중 조명했다. 중국의 관영 CCTV 역시 카메라를 들고 이 학교의 교정을 누볐다. 전 세계 외신들의 눈을 사로잡은 주인공은 바로 2010
이 땅의 정치는 상대방을 향한 증오와 조롱, 배제와 혐오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상대를 무너뜨려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극단적인 진영 논리는 광장을 오염시켰고, 급기야 역사의 아픔마저 정쟁의 도구로 소비하는 잔인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어른들의 세상은 매일 같이 뉴스 화면을 통해 ‘타인을 모욕하고도 사과하지 않는 법’을 아이들에게 실황 중계하듯 보여주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삭막한 토양 위에서 자란 아이들이 기성세대의 나쁜 언어 습관을 닮아가는 것은 어쩌면 예고된 비극인지도 모른다. 최근 청룡기 고교야구 대회 현장에서 발생한 서울 배재고등학교 야구부의 부적절한 응원 구호 논란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씁쓸함을 안겼다.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상처와 희생자들을 비하하는 맥락의 은어들을 경기장에서 외친 사건은, 우리 기성세대들이 역사와 민주시민 교육을 어떻게 해 왔는지 성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사건의 끝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교육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희망의 이정표를 발견했다. 갈등을 증폭시키는 어른들의 얄팍한 계산 속에서도, 정작 당사자인 청소년들은 ‘진심 어린 사죄’와 ‘품격 있는 포용’을 통해 어른들보다 훨씬 더 성숙한
지금 대한민국의 학교는 ‘대적반란(大寂反亂)’ 중이다. 교실 문을 열면 때로는 전등불을 켜지도 않은 채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아이들이 모두 도를 닦으며 수행 중인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모두 고개를 45도 숙인 채, 영혼을 스마트폰 블랙홀에 저당 잡힌 모습이다. 선생님이 “얘들아” 하고 불러도 돌아오는 건 무음의 메아리뿐이다. 가히 ‘액정 화면 속의 무릉도원’에 빠진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이제는 국가가,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최근 경기도교육청이 학교 내 스마트폰 수거를 골자로 한 ‘폰 프리(Phone-Free) 스쿨’을 선언했다. 이를 두고 교육계 일각에서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탄식이 터져 나온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뜻이다. 왜 우리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 시간을 12년 전으로 돌려보겠다. 여기에는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보청기’ 오판과 글로벌 트렌드의 ‘역주행’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2014년, 대한민국 인권위는 “학교에서 학생의 스마트폰을 일괄 수거하는 것은 통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며 제동을 걸었다. 인권위의 취지는 숭고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학교 현장에 ‘스마트폰 면죄부’를 주
지금은 바야흐로 문해력의 위기임을 학교 현장의 교사는 물론 교육 전문가들이 나서 심각하게 우려하는 상황이다. 널리 회자되는 바와 같이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지루한 사과”로 오해하고,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알아듣는 교실의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디지털 원주민으로 자라난 아이들이 숏폼 영상과 자극적인 텍스트에 중독되는 사이, 생각의 뼈대를 이루는 문해력과 비판적 사고력은 급격히 붕괴되어 왔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교육부는 최근 주목할 만한 종합 대책을 내놓았다. 내년부터 초등학교 3~4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을 ‘독서교육 집중 학년’으로 지정하고, 2030년까지 교과 연계 독서 수업 모델 1,000개를 발굴하겠다는 것이 골자다(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6.07.02). 디지털 홍수 속에서 학교를 ‘생각하는 힘’의 보루로 만들겠다는 국가 차원의 책무성 강화는 매우 시의적절하며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청사진이라도 학교 현장의 실질적인 역동성을 담아내지 못하면 한낱 ‘문서상 정책’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이에 필자는 이번 ‘독서교육 집중학년제’가 단기성 이벤트나 교사들의 행정 부담 증가로 끝나지 않고,
2026년, 우리의 초·중·고 교육 현장은 거대한 역사적 실험의 장이 되었다. 교육계의 해묵은 논쟁거리였던 두 가지 정책이 올해 3월 1일을 기해 동시에 전국 학교의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는 수업 중 스마트기기 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일명 교내 스마트폰 금지법)’의 본격적인 시행이고, 다른 하나는 영어·수학·정보를 시작으로 전 학년 확대를 노리는 ‘AI 디지털교과서(AIDT) 및 AI 중점학교’의 본격적인 확산이다. 교육학을 전공하고 평생 교단을 지켜온 원로 교육자인 필자의 눈에, 2026년의 이 상황은 참으로 기묘하고도 사유를 촉발하는 모순으로 다가온다. 아침 등굣길에는 “정신을 산만하게 하니 스마트폰을 꺼라”며 법의 제재를 들이대고, 1교시 수업 종이 울리면 “미래 인재가 되어야 하니 태블릿 PC를 켜고 AI에 접속하라”고 독려하는 이 숨 막히는 엇박자, 이것이 바로 2026년 대한민국 교육계에서 가장 뜨거운 ‘핫(hot)’한 뉴스이자, 우리 교육의 민낯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기술을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기술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가? 이 이분법적 혼란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와 정신 건강을 동시에 구출해
한때 우리 사회에는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널리 회자된 적이 있다. 과거 한 대기업 총수가 던진 이 직설적인 화두는 글로벌 무한 경쟁 시대를 예견하고 미래의 생존 법칙을 관통하는 명언으로 일찍이 기업가의 혜안과 창조 정신을 통해 이 세상에 실존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재는 인재가 곧 국력이고, 인재의 국적이 곧 영토의 크기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21세기 기술 패권 시대, 대한민국은 과연 세계 무대를 주름잡을 인재들을 제대로 키워내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육 시계는 거꾸로 흐르고 있다. 최근 방영된 KBS 다큐 인사이트 《인재전쟁 2》(2026년 5월 방송)은 대한민국 교육이 마주한 거대한 모순과 딜레마를 냉정하게 폭로하며 우리 사회에 묵직한 돌직구를 날렸다. 전 세계가 AI와 휴머노이드, 우주 항공 등 미래 첨단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총칼 없는 ‘인재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의 일류 인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의대 입시’라는 단 하나의 문으로만 맹렬히 돌진해 심각한 병목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반도체와 AI를 전공하던 최고 수준의 공학 인재들마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N수생이 되어
최근 대한민국 학문의 심장부라는 서울대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검은색 가죽 재킷을 문신처럼 입고 다니는 세계 AI 생태계의 포식자, 젠슨 황 엔비디아(NVIDIA) 회장이 깜짝 방문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공학도와 청년들이 그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현장의 열기는 흡사 세계적인 팝스타의 내한 공연을 방불케 했다. 그런데 이 날카롭고 영리한 기업가가 서울대 학생들을 향해 던진 한마디가 필자의 가슴에 깊은 울림, 그리고 무언가 뒤통수를 정통으로 가격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지금 이 시대의 학생들이 진심으로 부럽다.” 세계 최고 부자 반열에 오른 이가, 통장 잔고는 가볍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어깨가 무거운 대학생들에게 “부럽다”니?. 일견 “재벌 회장님의 기분 좋은 덕담 아니냐”며 웃어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대단히 획기적이고도 무서운 통찰이 숨어있다. 이 거물의 고백은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과, 그 안에서 꿈을 키우는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는가? 젠슨 황이 우리 학생들을 부러워한 이유는 명확하다. 지금의 청소년과 청년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기술적 도구인 ‘생성형 AI’를 태어날 때부터 혹은
우리에게 가장 생명력이 길어야 할 단어를 꼽으라면 그것이 무엇일까? 필자로서는 단연 ‘교육’이다. 왜냐면 흔히 교육을 일컬어 ‘백년대계(百年大計)’, 즉 백 년을 내다보고 세우는 큰 계획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교실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백 년은커녕 ‘오년대계(五年大計)’, 아니 다음 선거 때까지만 버티면 다행인 ‘반짝 대계’로 전락한 것 아닌가?. 5년마다 정권이 바뀌고 교육 수장이 바뀔 때마다 또 4년마다 교육감이 바뀔 때마다 교실은 거대한 실험실이 되곤 했다. 예컨대, 고교학점제가 전면 도입되었다가 슬그머니 문턱이 낮아지고, 정시와 수시의 비율은 시소게임을 하듯 출렁이며, 자사고와 외고는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다시 부활하는 ‘불사조’ 같은 운명을 반복한다. 이쯤 되면 교과서와 교육 정책은 교육학적 고민의 결과물이 아니라, 정치권의 ‘선거용 전리품’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지우기 어렵다. 우리는 거대한 적대적 양당정치가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며 반사이득을 챙기는 동안, 수권 역량이나 국가 비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교육 정책도 ‘네 편과 내 편’으로 쪼개져 나눠먹기의 대상이 되었다. 정치가 교육을 꽁꽁 틀어쥐고 좌지우지하는 이 심각한 상
2500년 전, 인류의 스승 공자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명쾌한 진단을 내렸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 父父子子).(<논어(論語)> 안연편). 시대를 관통하는 이 명언을 2026년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아마 스승 공자도 혀를 차며 이렇게 고쳐 쓸지 모른다. ”학학교교(學學校校), 학교는 학교다워야 하고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고려대학교 심리학부 고영건 교수는 동아일보(2026년 6월 18일)에서 행복한 삶의 필수 조건으로 ‘학교다운 학교’에서의 배움 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왜 지금 이 시점에 우리는 당연하기 짝이 없는 ‘학교다운 학교’를 힘차게 외치고 있는 것인가? 요즘 학교는 마치 ‘중요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고전 소설’과 같다. 누구나 그 중요성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학교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나?”하고 물으면 모두가 시선을 회피하기 바쁘다. 실제로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교육여론조사 등 다양한 지표를 보면, ‘각자의 가능성을 키우는 교육’의 중요도와 실제 달성도 간의 격차는 안타깝게도 매년 역대급 신기
2,500년 전 둥양의 스승 공자는 <논어(論語)> ‘학이편’에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을 익히고 미루어서 새것을 알면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묵직한 가르침을 온몸으로, 그것도 아주 신명 나게 증명해 주는 거대한 ‘길거리 교과서’가 지금 우리 곁에서 축제로 부활하고 있다. 바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자, 천년의 역사를 품은 ‘강릉단오제’이다. 매년 음력 5월 5일(올해 2026년은 양력 6월 19일이 바로 그 축제의 절정임) 무렵이 되면, 강릉 남대천 들판은 신과 인간, 그리고 전국의 야시장 마니아들이 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해방구로 변신하는 행사가 거행된다. 요즘 일반적인 우리 사회는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인터넷 댓글창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학교는 대학 입시라는 서바이벌 게임이 되어 아이들을 무한 경쟁, 적자생존으로 내몰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교육의 본질 및 중요도와 실제 달성도 간의 격차가 역대급으로 벌어진 ‘무늬만 교육’인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정서적 결핍 상태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삭막한 시대에 강릉단오제는 짚신을 신고 갓을 쓴 채 나타나 우리 교육의 뒤통수를 유쾌하게 후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