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진료실에 보호자가 종이 뭉치를 들고 왔다. 밤새 검색한 결과를 인쇄해 온 것이다. 이 증상은 이 병일 수 있고, 저럴 땐 저 병일 수도 있다며 출력물을 한 장씩 넘긴다. 정보는 넘쳤다. 나는 한 가지를 물었다. "그래서 아이가 요즘 어떤가요?" "평소랑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며칠 전보다 지금은 좀 나아진 건가요, 아니면 나빠진 건가요?" 보호자는 답하지 못했다. 그때그때 보이는 증상만 검색했을 뿐, 증상의 정도나 경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보호자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검색은 성실함이다. 다만 그 성실함이 이상한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답은 잔뜩 손에 쥐었는데 정작 자신의 견해는 부재했다. 요즘 교실에서도 같은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학생이 독후감 과제를 제출한다. 매끄럽고 오탈자 하나 없다. 그런데 선생님이 물어본다. "그래서 이 책 어땠어?" 학생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한다. "몰라요. AI가 써줬어요." 정보는 넘치는데 자기가 겪고 판단한 건 비어 있다. AI가 아이에게서 앗아가는 건 문장력이 아니다. '모르는 채로 머무는 시간'이다. 원래 사람은 모를 때 머뭇거린다. 그 머뭇거림은 낭비가 아니다. 모르
아이가 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비슷하다. "몰라요. 그냥 짜증나요." 부모는 이 말을 오래 곱씹는다.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다. 그런데 아이는 정말 몰라서 그렇게 말한다. 화가 난 건지, 서운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그저 피곤한 건지. 마음은 분명히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이름이 없다. 어른도 다르지 않다. 기분이 나쁜 건 알겠는데 왜 그런지는 모를 때가 많다. 마음이 복잡한 건 분명한데 말로 풀어내려 하면 막막해진다. 대부분의 감정은 정리가 안 돼서 힘든 게 아니다. 이름이 붙지 않아서 더 힘들다. 최근 본 드라마에서 한 인물이 이런 말을 한다. 자신에게는 사람마다 감정덩어리로 보인다고.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나는 독서 모임을 운영한다. 그러면서 같은 장면을 자주 본다. 시작할 때 어딘가 굳어 있던 표정이 끝날 즈음이면 한결 풀려 있다. 대단한 책을 읽어서가 아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건져 올리는 문장이 다르다. 누군가 "저는 이 대목에서 한참 멈췄어요"라고 말하면, 그 한마디에 자기 마음 한구석을 들여다보게 된다. 모임이 하는 일은 단순하다. 막연하던 마음에 이름을 붙여 보게
"기대를 좀 내려놓으세요." 요즘 부모 교육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자녀에게 거는 기대가 결국 아이를 짓누르는 압박이 된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성적표를 받아 든 아이의 굳은 얼굴, 진로를 두고 부모와 자녀가 부딪치는 장면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나는 이 조언이 절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본다. 같은 병, 같은 처지의 동물을 두고도 보호자의 태도는 갈린다. 한쪽엔 끝까지 매달리는 보호자가 있다. 가망이 흐릿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해보고 싶다"며 작은 가능성에 마음을 건다. 다른 한쪽엔 일찍 손을 놓는 보호자가 있다. "이만큼 살았으면 됐다"며 치료를 접는다. 간절히 매달린 쪽이 늘 이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보호자가 마음을 거둔 순간, 회복의 가능성까지 함께 닫히는 경우를 나는 자주 봤다. 관심이 끊긴 자리에선 기회도 줄어든다. 나는 두 딸을 둔 아빠이자, 매일 병원에서 보호자와 반려동물을 마주하는 수의사다. 양쪽에서 오래 지켜보며 깨달은 게 있다. 기대를 완전히 거둬들인 자리에는 응원이 아니라 무관심이 들어선다는 것. 심리학에는 ‘로젠탈 효과’ 또는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개념이 있다. 1960년대 심리학자 로버트
"우리 아이, 책상에 앉혀 공부시키는 게 맞을까, 아니면 일단 밖으로 내보내 많이 경험하게 하는 게 맞을까?" 학부모라면 한 번쯤은 이런 고민 해봤을 거라 생각한다. 요즘 교육 현장에는 한쪽으로 기운 말들이 유행한다. "이론보다 경험이지." "책보다 현장에 답이 있지." 백번 읽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게 낫다는 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아이를 키우면 어느 순간 길을 잃는다. 나는 수의사다. 동물의 해부학과 생리학을 책으로 먼저 배웠다. 하지만 처음 수술대 앞에 섰을 때, 책 속의 그림과 실제로 손에 닿는 장기는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책이 쓸모없었을까. 그 반대다. 이론이라는 지도가 없었다면 나는 눈앞의 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더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수술이 끝나면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손끝에 닿았던 감촉, 예상과 달랐던 위치, 책에는 한 줄로 끝나 있던 대목이 실제로는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떠올리며 그림을 다시 봤다. 그러자 죽어 있던 그림이 살아났다. 다음 수술대 앞의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책에서 현장으로, 현장에서 다시 책으로. 그 왕복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나는 한 뼘씩
"인정 욕구는 버려라. 득은 없고 실만 있다." 흔히 듣는 말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책이 서점에 가득하고,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을 미성숙의 증거처럼 말하는 사람도 많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절반만 맞는 말이다. 나는 이 통념에 반대한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의 동기를 5단계 욕구 위계로 설명하면서, 네 번째 단계에 타인의 존중과 자기존중에 대한 '존중 욕구'를 두었다. 이 단계에서는 타인의 인정과 존경,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성취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통해 자존감을 형성하려는 욕구가 두드러진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개인의 약점이라기보다 타인과 관계 맺고 공동체 안에서 자리 잡기 위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심리적 필요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당신이 옳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과 인정에 대한 욕구를 더 압축해서 말하면 '사랑에 대한 욕구'다. 인정 욕구는 사랑 욕구의 유아기 이후 또하나의 변주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다. 이걸 버리라는 건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라는 말과 같다.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진로·직업 특강을 다니면서 받는 질문이 있다. "그 일을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그러면 나는 늘 질문을 하나 보탠다. "여러분은 지금 왜 그 학원에 다니나요? 왜 그 학과를 준비하나요?" 대답은 비슷하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작은 목소리. "엄마가 시켜서요." "다들 다니니까요." "그냥요." 탓할 일은 아니다. 아이만 그런 게 아니다. 어른도 그렇다. 왜 출근하는지, 왜 결혼해야 하는지, 왜 그 동네에 살아야 하는지, 곰곰이 답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당연한 거니까, 그냥 하니까. 이번 칼럼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다. '그냥'은 없다. '당연한 것'도 없다. 학원 등록 장면을 떠올려 보자. 가장 흔한 풍경은 부모가 먼저 등록하고 아이에게 "오늘부터 다녀"라고 통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서가 거꾸로여야 한다. 아이가 수학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글이 막힌다고 느껴서, 영어 회화가 답답하다고 느껴서, 스스로 "엄마, 이 학원 다니고 싶어"라고 말한 뒤 등록되는 게 맞다. 그래야 비싼 학원비가 제값을 한다. 이유와 목적, 목표를 가진 아이는 학원에 가는 자세부터 다르다. 자기가 채우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끌
진로 상담을 하다 보면 받는 질문이 있다. "어떤 직업이 유망한가요?"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한다. 10년 뒤에도 살아남을 직업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직업의 지형은 너무 빠르게 바뀐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꾼다. 어떤 직업을 택하든 변하지 않는 토대는 무엇인가. 내 대답은 세 가지다. 읽기, 쓰기, 말하기. 이 셋은 재능이 아니라 습관이다. 읽기는 생각의 재료를 만든다. 책을 읽다 보면 내가 막연히 느끼던 것을 누군가 이미 문장으로 정리해 둔 것을 만난다. 그 문장을 빌려 내 생각을 비춰볼 수 있다. 읽지 않으면 생각의 재료가 늘 부족하다. 나는 마흔 전까지 책과 담을 쌓고 살았다. 학창 시절 교과서와 전공서를 제외하면 읽은 책이 열 권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다 마흔에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이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그 한 권이 다음 한 권을 불렀고, 생각의 폭이 달라지자 삶의 방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읽기는 습관이 될 때 비로소 힘을 낸다. 처음엔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것도 버거웠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이어가자 시키지 않아도 손이 책으로 갔다. 습관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쓰기는 생각을 내 것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다. 새벽에 일어나고, 주말도 반납하고, 작심삼일을 반복하면서도 다시 일어선다. 그런데도 뭔가 잘 안 된다는 느낌이 남는다. 왜일까. 나는 이 질문에 하나의 답을 갖고 있다. 간절함이 없거나 부족해서다. 좋은 성과를 내려면 적어도 네 가지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 좋아해야 한다. 잘해야 한다. 간절해야 한다. 왜 하는지 알아야 한다. 네 가지를 다 갖추면 더할 나위 없다. 이 네 가지 중 뿌리가 되는 것은 단연 '간절해야 한다'이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좋아하지만 성과가 안 나오면 흥미는 서서히 식는다. 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잘하지만 더 나아가야 할 이유가 없으면 현재 수준에 안주하게 된다. 왜 하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유를 '아는 것'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은 다르다. 이유를 열 개 댈 수 있어도 가슴이 뛰지 않으면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간절함은 다르다. 간절함이 있으면 왜 하는지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고, 잘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좋아하지 않더라도 버틸 힘이 생긴다. 간절함은 나머지 셋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꾸준함이다. 그리고 이 꾸준함이라는 못을 박으려면 간절함
몇 년 전 일이다.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운 적이 있다. 창밖에 인테리어 공사를 하시는 분들이 계단에 앉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소가 담긴 얼굴이었다. 단순히 기분이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모습, 그래서 행복해하는 모습이었다. 무척 부러웠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게 화두를 던졌다. 나는 언제 저런 표정을 지으며 살까. 그 물음이 오래 남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표정은 직업의 '직(職)'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이 진로를 고민할 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있다. "어떤 직업이 유망한가요?" 의사, 변호사, 공무원. 자리를 목표로 삼는다. 직은 자리다. 티오다. 일자리다. 누군가 그 자리에 나를 불러줘야 생기는 것이다. 문제는 그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더 갈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 자리가 사라지면 뭘 하지, 라는 공허함만 남는다. 직에 갇히면 세계가 좁아진다. 반면 업(業)은 다르다. 업은 자리가 아니라 방향이다. 목적이다. 나는 수의사다. 수의사라는 직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작가이고 강연가이고 칼럼니스트다. 많은 분이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다양하게 하실 수 있어요?" 사실 나
'해야 할 이유'부터 찾는 사람이 있다. 충분한 이유가 생겨야, 완전히 준비가 되어야, 자신감이 생겨야 움직이겠다는 사람이다. 이 마음은 신중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회피다. 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쌓일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기회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가 있다. 나는 관점을 바꿨다. '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게 아니라, '안 할 이유'가 있는지부터 묻는 것이다. 안 할 이유가 딱히 없다면 일단 한다. 몇 년 전, 수의사·작가 직업인 특강 의뢰가 한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기다렸다. 그런데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강연 플랫폼 측에 먼저 문을 두드렸다. 나름의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 덕에 담당자와 접점이 생겼다. 그 뒤로 연락이 왔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다. 적극성을 띠는 사람에게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주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안 할 이유가 없다면 먼저 움직여야 한다. 부산시청에서 200여 명 청중 앞에 서는 강연 제안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많은 청중 앞에서 강연한 건 처음이었다. 두렵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안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일단 수락했다. 강단에 오르고, 말을 꺼내고, 마치는 그 시간 전체가 내게 하나의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