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고 습기 가득한 여름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 바람은 물을 잔뜩 머금은 나무들의 무성한 잎사귀를 흔들고는 무심히 지나간다.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길은 최근에 새로 알게 된 산책로다. 길게 이어진 가로수 길은 그늘이 드리워져 뜨거운 햇살을 피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천천히 초록이 짙어가는 잎들에 시선을 주고, 잘 다져진 황톳길의 딱딱함이 전해지는 발바닥에 신경을 쓰며 출발하는 길. 하지만 어느새 생각은 정해진 방향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에서 시작된 생각은 너무 비싸진 시장바구니 물가에 불만을 쏟아낸다. 그러다 금방 며칠 후에 있을 친구와의 약속을 떠올린다. 나에게 “나 지금 뭐 하고 있던 거지?”라는 깨달음이 왔을 때는 이미 10여 분을 걸어온 후다. 그 10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몸은 습관적으로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 없었다. 내가 걸어온 길 사이에 있던 나무 한 그루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없다. “그게 어쨌다고? 무슨 문제 있어?” 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것”이
오후 5시, 단골 A 카페는 한산하다. 언제나처럼 라떼를 주문하고 가방에서 책이며 노트북을 꺼내는데 아뿔싸 안경이 없다. 다른 것도 아니고 눈을 두고 왔으니 어쩔 수 없이 집에 다녀와야 한다. 카페 주인에게 금방 다녀오겠다 얘기하고 걸음을 재촉해서 다녀온다. 테이블 위에는 라떼 한 잔이 이미 올려져 있다. 커피잔을 들려고 하는 순간, 카페 주인이 다가오며 말한다. “새로 만들어 드릴게요.” “괜찮아요. 제가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온 건데 신경 쓰지 마세요.” “만들고 5분만 지나도 맛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항상 옆에 두고 글 쓰시는데 제 마음이 새로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요.” “정말 감사해요. 좋은 글 쓸게요.” 생각지도 못한 카페 주인의 마음 씀씀이에 가슴엔 따뜻한 파문이 인다. 나는 다른 일이 없는 날엔, 오후 5시경이면 A 카페를 찾는다. 항상 라떼를 시키고 늘 앉는 그 자리에서 글을 쓴다. 저녁 시간이면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카페.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지도 않는다. 오히려 서로에게 방해가 안 되려는 사람들처럼 서로 조심스럽다. 그리고 8시경이면 카페 주인은 뜨거운 물 한 컵을 조용히 올려놓고 사라진다. 처음 며칠 내가 뜨거운 물을 찾았더니
“나도 언니처럼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얼마 전 신문에 연재된 내 글을 읽은 지인이 보낸 문자이다. 언젠가 통화를 할 때도 글쓰기에 관심을 보이길래, “뭐라도 좋으니까 일단 써. 가장 접근하기 좋은 게 블로그인 것 같아. 닉네임으로 통하니까 네가 누군지도 몰라. 일기도 좋고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면 점점 글쓰기가 익숙해질 거야. 편하게 접근해 보자.”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지인은 여전히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이번에도 나의 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쓰기는 무조건 쓰는 수밖에 없어. 매일 딱 한 줄이라도. 일단 시작해 봐. 그럼 고민의 내용도 달라질 거야.” 정말 이번엔 지인이 시작할 수 있을까? 일단 시작을 해야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을 잘하는지 알 수 있다. 글쓰기뿐만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일에 해당이 되는 말이라 생각한다. 저질러봐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방향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나는 호기롭게 시작하고 중도 포기한 것들이 많다. 주변에선 내가 시작은 잘하는데 끝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남편과 어쩌다 자격증을 따겠다며 들인 시간과 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조용히 입 다물
얼마 전 비 내리는 토요일. 지역에서 나름 알아주는 쌍화탕 조제 전문점에 들린 적이 있다. 맛을 보라며 따뜻하게 데워진 쌍화탕을 건네는 사장님의 얼굴이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다. 컵을 두 손으로 꼭 잡는 순간 따스함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한 모금 마시자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사르르 녹고 마음도 편안하다. 문득 건물 입구에서 촉촉한 5월의 비를 맞으며 탐스럽게 피어있던 작약꽃이 떠오른다. “작약이 활짝 폈어요. 이맘때가 꽃이 한창 필 때인가 봐요?” “그렇죠. 지금 꽃이 이쁘게 필 때죠. 쌍화탕에 작약 뿌리가 들어가요. 그래서 작약밭을 크게 하는데 꽃이 볼 만하죠.” 라고 말씀하시는 사장님의 얼굴엔 좋은 재료를 쓴다는 자부심과 작약꽃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생긴 것에서 오는 반가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보인 작은 관심은 의외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가게 여기저기에는 다양한 화초가 자라고 있었고 윤이 날 정도로 반짝이는 화초의 모습에 신기해하자, 사장님은 “좋은 약재 찌꺼기” 덕분이라며 웃으신다. 사장님은 기분이 좋으셨던지 “작약꽃 몇 송이 드릴까요?”라고 하시며 바깥으로 나가신다. 잠시 후 나는 보라색과 흰색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작약꽃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