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라는 단어에 사용되는 비(比)는 날카로운 칼(匕) 두 개를 서로 견주는 것이다. 즉, 어느 것이 더 날카로우냐 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가치중립적이어서 사용하기에 따라 긍정적인 효과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소지가 다분하다. 비교는 두 가지로 쓰이는 수가 있는데 타인에 의해 내가 누군가와 비교되어 평가 받는 것이 하나이고 내가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여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엄마, 나 오늘 산수 90점 받았어!” 자랑하고픈 아이에게 “아무개는 몇 점 받았는데?” 하거나 아이가 백 점을 받았다고 해도 엄마는 칭찬 대신 학급에 백 점짜리가 몇 명인가를 묻는다. 자신의 자녀 외에 다른 백 점이 있으면 문제가 쉬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절대평가를 하지 않고 누군가와 비교해 자리매김을 한다면 아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의 기대치를 충족할 수 없음을 알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 이 ‘비교’가 자칫 우리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도 정당화 하게 한다. 해서는 안 되는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도 ‘나만 그런가? 남들도 이 정도는 다 하는 일이야!’ 하며 위안을 찾는다. 검은 셔츠를 입으면 목에 하얀 때가 낀다. 그렇다고 때를 하얗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얀 셔츠를 입으면 까만 때가 끼지 않는가? 그러므로 흑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무엇과 비교를 해서는 안 되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나는 어른들을 따라 벼논에 김매기를 했다. 방동사니나 그렇고 그런 풀들은 벼 이파리와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에 금방 눈에 띄지만 ‘피’라는 녀석은 벼와 얼마나 똑같은 지 좀처럼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햇빛에 비추어 보면 벼보다 연한 녹색이면서 잎맥의 중심부에 흰 줄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어린 시절의 경험이 훗날 얼마나 큰 깨달음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때 이후 선택의 기로에 설 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데는 빛이 필요하구나! 모호할 때는 빛을 비춰보면 되겠구나!” 하곤 한다.
암행어사가 지닌 물건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쌍마패니 오마패니 하는 마패(馬牌)이지만 마패 못지않게 유척(鍮尺)이라는 중요한 물건이 있었다. 이는 놋으로 만든 자(尺))인데 국가가 제작한 표준 자이다. 옛날에는 춘궁기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이나 피륙을 빌려주고 추수 때에 받아들이는 ‘춘대추납(春貸秋納)’ 제도가 있었는데 지방관들이 이를 악용하여 규정보다 작은 자(尺)나 되(升)로 빌려주고 가을에 받을 때는 큰 자나 되로 받아 부를 축적하는 폐단이 성행했다. 그래서 암행어사는 도착하자마자 창고를 봉하고(*봉고파직(封庫罷職)이라 할 때의 봉고(封庫)) 장부를 압수한 다음 객사에 가 장부를 면밀히 검토하고 관아에서 사용하는 자나 되가 자신이 가지고 온 표준 자와 일치하는지 여부를 살폈다. 그리고 창고에 가서 재고 조사를 했다. 모든 폐단이 측량 기구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표준 자가 필요했다.
우리에게도 표준 자가 필요하다. 내가 걷는 걸음이 똑바른지 비틀거리는지 나의 처사가 모자라는지 넘치는지는 주변 사람들과 견주지 말고 곧은 자로 재야한다. “나는 왜 아무개처럼 잘나지 못했을까?” 혹은 “내가 이래 뵈도 아무개 보다는 낫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다만 어제의 나와 비교하여 더 나아졌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각자의 능력과 처지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시인 김춘수는 ‘꽃’이라는 시에서 과장도 말고 비하도 말고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라고 말하며 합당한 자리매김을 원하고 있다. 실제로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아무개의 동생’이라든가 ‘아무개의 형(누나)라고 불리는 것이다. 자신 만의 교유하고 정당한 가치를 부여받고 싶은 것이다. 아이들을 비교 대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 대해주자. 그리고 아이들에게 절대선(絶對善)에 입각한 가치관을 가르치자.
▲ 최홍석 칼럼니스트
최홍석
전남대학교 국문과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서울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교감 및 교장 정년
[대한민국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