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4 (수)

약속(約束)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차를 죽어라 따라가다가 망연자실하던 개는 버려진 자리에 돌아와 마냥 주인을 기다린다. 주인으로부터 버려진 개들이 차량 통행이 많은 도로나 비바람이 거센 갯바위 등에서 몇 달 혹은 몇 년을 한 결 같이 주인을 기다리는 장면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매정한 주인은 자신을 버려두고 떠났지만 사정을 알 리 없는 개는 비바람과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도움의 손길마저 거부한 채 언젠가 자신을 찾아올 주인을 행여 놓칠 새라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주인과 맺은 약속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모습은 춘추시대에 노(魯)나라에서 살았다는 미생(尾生)이라는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에 미생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미생은 어떤 사람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이 계속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교각(橋脚)을 끌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다. 전국 시대, 소진(蘇秦)은 신의 있는 사람의 본보기로 미생의 이야기를 들었고 같은 전국 시대를 살다간 장자(莊子)는 “쓸데없는 명목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자" 라고 했다.

 

미생이 옳았는지 어리석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약속이 너무나 쉽게 버려지는 요즘 그가 비록 어리석었다 하더라도 떠올려 봄직하다. 우리는 남남이 만나서 사회를 이룬다. 그런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여 공동생활을 영위할까? 그것은 약속의 바탕위에 세워진 서로간의 신뢰일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상 동물 중에 가장 신의 없는 것이 인간이다. 부부 사이의 백년가약은 너무 쉽게 헌 맹세가 되고 매번 선거 때가 되면 호화찬란한 공약들을 남발하지만 그것이 지켜지는 예는 거의 없다.

 

오랜 과거에는 우유 배달하는 소년과의 약속 때문에 탈출을 포기하고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과학자, 친구와의 약속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로마의 청년 등 신의를 목숨보다 중히 여긴 이들이 있었다. 계포(季布)는 項羽(항우)와 劉邦(유방)이 천하를 두고 각축하던 楚漢(초한) 전쟁 때 초나라의 장수였다. 젊었을 때부터 의협심이 강했고 한번 약속을 하면 끝까지 지키는 사람으로 평이 났다. 그래서 훗날 ‘계포의 승낙을 받는 것이 일백 근의 황금을 얻는 것보다 낫다’는 속담까지 만들어 낼만큼 신용을 잘 지키는 대명사로 일컬어졌다. 약속은 그 자체로서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 냈을 때가 아름다운 것이다.

 

베트남 전쟁 때, 한 미군 조종사가 포로가 되었다. 그는 결혼 지 몇 개월도 안 된 젊은이였다. 적들은 그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그를 비밀 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사망자 명단에도 포로 명단에도 없는 공식적으로는 지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 몇 달은 잠도 안 재우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얼마 후 독방에 던져진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점점 시간과 날짜를 잊어갔고 자신의 존재마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죽을 결심을 했다. 가까스로 조약돌을 손에 넣어 벽에 갈기 시작했다. 날을 세운 다음 동맥을 끊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멀리 창살 밖으로 땅에 떨어진 음료수 캔의 고리를 발견했다. 그는 결혼반지를 생각해 냈고,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을 생각했다. 혼자서 죽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갈고 있던 조약돌로 벽에 날짜를 새기기 시작했고 아름다운 모든 추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5년여 세월이 흘러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집에는 수천 장의 그의 사진이 거실과 주방과 욕실과 천장과 창고와…… 시선이 미치는 모든 곳에 붙어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를 잊지 않기 위해 온 집안을 그의 사진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정부로부터 사망 통보를 받았지만 믿지 않았다. 정부의 보상도 거절했다. 남편의 유해를 확인하기 전에는 인정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두 사람을 지켜준 것은 서로에 대한 약속과 믿음이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반려견 보다도 신의가 없음이 부끄럽다.


 

 

▲ 최홍석 칼럼니스트

 

최홍석

전남대학교 국문과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서울삼육고등학교 국어교사
호남삼육고등학교 교감 및 교장 정년

 

[대한민국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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