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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금)

김연희 작가 에세이

내 젊은 날을 지켜준 것

김연희 작가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 16년을 살고 열일곱이 되던 해 이른 봄, 나는 고향을 떠났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기도 전, 아버지는 광산 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대신 생계를 책임지셨던 엄마는 바깥 활동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셨고, 나의 일반 고등학교 진학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친구들이 일반 고등학교 진학 준비로 들떠 있을 때, 나는 경북 구미의 모 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갔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공장을 다니면서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산업체 고등학교라는 제도가 있던 시절이라 가능한 이야기다. 그 시절엔 그것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얼마 후, 나는 엄마 품을 떠나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 가장 느린 기차였던 비둘기호를 타고 새로운 세계로 등 떠밀리듯 나아갔다. 내가 입사한 곳은 회사 내에 고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처지의 다른 아이들보다 환경이 좋았던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공장은 공장이었고 아직 산업현장에서 3교대 근무를 하며 공부를 한다는 것은 10대의 어린 나에겐 너무나 버거웠다. 앞으로 이것이 내 생활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엔 쉽지 않았던지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다.

 

 

현실이 주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방황하는 나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책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는데. 특히 6살 터울의 오빠가 빌려오는 책을 옆에서 기웃거리며 따라 읽고, 나중에는 내 수준을 넘어서는 책들을 무턱대고 읽어대기도 했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었던 나는 중학생 시절부터 20대까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듯 보낸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중학생 때 사춘기를 호되게 앓으면서 더욱 말 없는 아이가 되었고, 집을 떠나서는 외톨이가 되기 싫어 적당히 친화력을 발휘하고 내 생활에 그럭저럭 만족해 보이는 사람으로 살았다. 하지만 내 안의 나는 늘 답답함과 외로움에 울고 있었다.

 

 

그렇게 10대의 어린 마음은 외롭고 힘든 생활로 지쳐갔다. 어느 날,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연희야, 너는 항상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된단다.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아.”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제자가 위태롭게 보였나 보다.

 

 

그 위태로움이 더 위험해지지 않도록 해 준 것은 독서다. 사춘기를 호되게 앓고, 학업을 병행하며 돈을 벌던 그 시절에도 변함없이 가까이 있던 것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10대의 학창시절과 20대의 나는 현실 부적응자이기도 했지만, 내 인생의 가치관을 책 속에서 배우고 성장시키던 시기다. 나는 <논어>를 읽으며 사람은 공자의 가르침처럼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 말이 너무 멋있게 느껴졌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조금은 다른 별종으로 취급을 받았던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3교대 근무는 퇴근 시간이 아침일 때도 있고, 한밤중일 때도 있다. 일에 지쳐 늘 수면이 부족한 생활이었지만,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설로 나온 것이지만, 손자병법, 초한지 등에 등장하는 걸출한 영웅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좋아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장르를 가리지 않는 독서였던 것 같다. 책을 읽는 순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일까? 책을 펴는 순간 나는 가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내가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구경꾼이 되기도 한다. 그 세계에서 심장이 뛰고 문장들이 살아서 내게 온다.

 

책은 내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길을 안내해주는 인생의 스승이었다. 20대 초반까지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미친 듯이 빠져들었던 책들은, 너무 일찍 모든 것을 혼자 책임져야 했던 한 아이를 정신적으로 지탱해주는 도덕책이 되어 준 것이다.

 

좋은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고 한다. 내 인생을 바꿔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기본 예의는 갖추고 살게 이끌어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의 10대와 20대를 생각하면 희망이 샘솟거나 밝은 미래를 꿈꾸던 시기는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고, 끝도 없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던 때다.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가득했던 나날이었지만, 그런데도 나는 그때가 아름답다.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현실이란 먹구름을 뚫고, 내가 길을 잃지 않게 지켜준 책이라는 한 줄기 햇살이 비춰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아이는 50대의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수십 년의 시간을 살면서 한때 삶에 치여 책을 덮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다시 힘을 내보자고 다짐하는 순간, 나를 일으킨 힘은 젊은 날 읽었던 책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책의 내용은 가물거리고 잊은 게 대부분이지만, 그때의 설레던 느낌은 그대로다. 여전히 책이 알려주고자 했던 배움과 교훈은 가슴이 기억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어두웠던 내 젊은 날은 책이 있었기에 여전히 아름답게 살아 숨 쉬고 있다.

 

김연희 작가는

글 쓰는 순간이 행복해서 계속 씁니다. 마음과 영혼을 이어주는 글을 통해 의식 성장을 하며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는 작가로 살아갑니다.

 

브런치 작가로 활동 중이며,저서로는 <치유글약방> 2023, <성장글쓰기>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