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볼 수 없게 된 걸까. 가끔씩 공중전화 박스를 보기도 하지만 안에 전화기는 없다. 어린 시절, 공중전화는 급한 일이 있을 때 혹은 가족 중 누군가가 집 전화를 사용하고 있을 때 이용하는 편리한 도구였다. 이제는 그런 제한이 없다. 각자가 휴대전화를 가져 다니고 있다. 와이파이만 있으면 앱을 이용해 저렴한 가격에 전화를 걸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원하는 상대와 원하는 대로 대화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자유의 대가로 무엇을 잃었을까? 사람들은 원할 때 전화를 걸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인내심을 잃은 것 같다. 우리는 더욱 빠른 의사결정을 요구받았고,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빼앗겼다.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였던 황진이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남성의 방문을 기다리며 나뭇잎이 흩어지는 소리조차 그 사람이 오는 발자국 소리가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읊었다.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대이기에 사랑은 더욱 불타오르고, 답답한 마음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동시에 기다리는 마음은 인내심을 키웠고, 또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탄생시켰다. 만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관심사가 아닐까? 글에는 내용을 전하고자 하는 자와 그 정보를 받는 자가 반드시 있고, 특히 정보성이 있는 글에 대해서는 타겟으로 되는 자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도 대상자들의 고민에 답을 주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전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내용을 나보다 정확히 표현하는 분이 쓴 글을 다시 읽어 보면 어조가 생각보다 더 조용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대화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르쳐 줄게” 라는 방식으로 상대방이 이야기한다면 듣는 사람은 쉽게 그 내용을 받아드릴까? 예를 들어 아이를 생각하는 나머지 이것저것 조언했는데 아이에게 거부당했다는 경험을 갖고 있는 부모들은 나만이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내용이 좋다고 해도 강요하는 태도라면 조언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반대로 상대방이 조언이 아니라 자기 경험담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 오히려 더 쉽게 깨달음을 얻을 경우가 많지 않을까? 강원국 작가의 조언이다. 글은 독자와의 대화이며, 말을 하고 글을 쓸 때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내용과 상대가 듣고 싶은 내용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