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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월)

임지윤 작가 에세이

커피와 약속


“사람은 약속을 지킬 때 강해진다” -마하트라 간디-

 

약속을 지키는 이와 지키지 않는 이와의 간극(間隙), 과연 기억력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문제일까?

약속을 지키는 사람에게 고마운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에 대한 존중이 있고, 자신의 말에 담긴 진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노력 때문이 아닐까?

 

“커피 공부를 하면서 커피에게 한 약속이 있다.”

 

사람도 아닌 음료를 보면서 약속을 지켜가는 건 어쩌면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켜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왜 커피를 하지?” 올봄, 나에게 조용히 건네 본 질문이다.

 

커피를 마시면 잠 못 이루던 나, 하루 몇 잔의 커피를 마시며 향미를 공부했던 시간 사이로, 큐그레이더(Q-Grader,국제 아라비카 감별사)를 준비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커피의 향미는 나에겐 커피가 전해주는 이야기로 들렸다. 혀와 코로 들어야 하는 커피의 이야기. 그것은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을 작은 속삭임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향미로 속삭이며 다가온 커피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게.”라고 약속했다.

 


커핑(Cupping)

 

커피의 향미 특성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컵 테스트(Cup Test)라고도 한다. 커핑을 통해 전문적으로 커피를 감별하는 사람을 커퍼(cupper)라 부른다.

 

아라비카 품종의 향미를 커핑을 통해 감별하는 이를 Q-Grader(국제 아라비카 감별사)

로부스타 품종을 감별하는 이를 R-Grader(국제 로부스타 감별사)라 한다.

아라비카와 로부스타는 커피의 품종으로 현재 상업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대표적인 품종이다.


 

커피의 작은 속삭임을 잘 듣기 위해 맵고 짠 음식, 너무 달거나 신 음식, 강한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들은 자연스레 피하게 되었다. 외출할 때마다 뿌리던 향수도 멀리하였다. 그렇게 아라비카 품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큐그레이더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향미로만 말하는 커피”

 

 

커피는 품종, 가공방식, 품질, 로스팅에 대한 모든 정보를 향미로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커핑은 커피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으로 후각과 미각 훈련이 필요한 이유다.

 

시험에 응시했을 당시는 코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때였다.

살얼음판을 걷듯 하루하루 조심하며 지냈던 그 시기.

시험을 앞두고 떨리는 마음을 잡기 위해, 평소 취미로 배우던 드럼 치러 갔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잠깐 드럼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연습한 다음날, 코로나 확진이 되었다는 선생님의 날벼락 같은 문자. 참담한 마음을 호흡으로 고르고 큐그레이더 인스트럭터에게 물어본다.

 

“확진자와 5분 정도 대화를 나눴고, 아직 코로나 증상은 전혀 없는데 시험 응시 가능할까요?”

 

돌아온 대답은 “안됩니다.”

 

이번에 보지 못하면 다음에 있을 시험에 응시해야 하는데, 이미 3일의 교육이 진행되어 원두에 대한 경험도 없이 바로 시험을 봐야 하는 막막한 상황.

더구나 다음 시험이 6개월 이후일지, 1년 후일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원두가 바뀌니 암담한 마음,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이 뒤엉겨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른다.

 

잠복기가 지나고 고열과 함께 찾아온 인후통을 겪으면서도 제발 후각과 미각만은 손상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 바람이 무색하게, 레몬을 잘라 냄새를 맡아봐도 아무런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김치도 매워서 못 먹을 정도로 순하게 만들어 놓은 혀가 아무 맛도 감지하지를 못한다. 씹히는 음식의 질감만 있을 뿐, 거기엔 어떤 향도, 맛도 없었다.... ...

 

커피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한 약속. 나의 꿈까지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약속 불이행, 상실의 시간.

 

몇 달에 걸쳐 서서히 회복되는 후각과 미각을 느끼며 조바심과 답답한 마음으로 보냈던 시간. 나는 늘 나 자신에게 물었다.

 

“왜 커피를 하지?” “넌 도대체 왜 하고 싶은 거니?” “그 약속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이야기를 내 주관적인 해석이 아닌 객관적인 기준으로 정확히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 그것이 커피와 했던 약속이었다.

 

커피가 왜 이런 향미를 품고 있는지, 왜 그런 맛이 나는지, 어떤 커피가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를 대신해 사람들에게 말해주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지키기 위해 발버둥에 가까운 노력을 했던 상실의 시간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와 놓아버리려는 나 사이의 간극(間隙)에서 버텨낸 시간이 내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드는 날들이 아니었을까?

 

아프고 힘들었던 상실의 시간이 고마운 이유. 그것은 약속에 담았던 말의 가치에 생명을 불어넣듯, 향을 맡을 수 없어도 아침마다 호흡처럼 반복했던 후각과 미각 훈련. 그 시간 안에서 나를 돌보고, 약속을 지켜나가는 자신에 대한 존중으로 가득 찬 날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