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약속 “사람은 약속을 지킬 때 강해진다” -마하트라 간디- 약속을 지키는 이와 지키지 않는 이와의 간극(間隙), 과연 기억력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문제일까? 약속을 지키는 사람에게 고마운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에 대한 존중이 있고, 자신의 말에 담긴 진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노력 때문이 아닐까? “커피 공부를 하면서 커피에게 한 약속이 있다.” 사람도 아닌 음료를 보면서 약속을 지켜가는 건 어쩌면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켜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왜 커피를 하지?” 올봄, 나에게 조용히 건네 본 질문이다. 커피를 마시면 잠 못 이루던 나, 하루 몇 잔의 커피를 마시며 향미를 공부했던 시간 사이로, 큐그레이더(Q-Grader,국제 아라비카 감별사)를 준비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커피의 향미는 나에겐 커피가 전해주는 이야기로 들렸다. 혀와 코로 들어야 하는 커피의 이야기. 그것은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을 작은 속삭임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향미로 속삭이며 다가온 커피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게.”라고 약속했다. 커핑(Cupping) 커피의 향미 특성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컵 테스트(Cup Test)라고도 한다. 커핑을 통해 전문적으로 커피
막아설 수 없는 것 “이제 여름도 다 끝났어.” 라고 아이에게 말한다. 치과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러자 아이는 “아냐. 지금 얼마나 더운데.” 라고 반기를 든다. 사실 햇살을 피해 걷고 있어도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이의 반응처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며 펄쩍 뛸지 모르겠지만, 그런데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새벽 공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새벽의 찬 기운을 기대하며 베란다 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 대신 끈적이고 후끈한 열기의 급습을 매번 받으며 얼른 닫고는 했다. 밤이 되어도 한낮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열기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매일 쌓이기만 하는 도시살이에 지쳐갈 때쯤이면 계절은 살금살금 변화를 예고한다. 푹푹 찌는 듯한 여름도, 말복(末伏)이 지나면서 새벽이면 선선한 바람이 기가 막히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미묘하지만 분명한 변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래전 어느 여름의 작은 깨달음 덕분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과일도 그 계절에만 먹을 수 있던 시절, 여름엔 수박을 빼놓을 수 없지 않을까. 나만 그렇게 느꼈을지 모르지만, 말복이 지나면 신기하게도 수박은 속이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얼음이 가득 담긴 자몽에이드 한 잔을 마시며, 큰 창 너머 파란 바다를 바라본다.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바다와 하늘 덕분인지, 방금 목 넘김을 한 얼음 때문인지 더운 열기가 사라지는 듯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파란 풍경에서 잠시의 여유를 찾는다. 그 사이 물길을 가르며 제트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이 커피숍 아래 선착장으로 들어선다. 여러 번 제트스키에 올라타본 듯 자연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은 미흡한 실력에 코칭을 받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으며, 바다 위에 떠있는 제트스키를 다루며 각자의 방식으로 즐긴다. 그 광경을 바라보다 그런 생각이 스쳤다. ‘시원하겠다... 재미있나 보네. 왜 나는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을까.’ 물을 좋아하지만, 물을 무서워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이어서인지, 용기가 없어서였는지, 삶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카테고리의 장면을 마주하고 있으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에는 물이 무서워 수영을 배우는 것을 주저했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배우지 못했다. 이제는 물에 들어간다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 되어, 바다든 계곡이든 발만 담그는 정도에서
실력이 없다고 느꼈다면 오히려 기뻐하라 1년 반 전부터 알토 색소폰을 배우고 있다. 어제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연습하다 보면 예전보다 실력이 떨어졌다고 느낄 때가 있어. 하지만 그건 귀가 예민해서 그렇지. 나도 예전에 실력이 떨어졌다고 느낄 때마다 우울했는데, 지금은 이게 실력이 향상된 결과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됐어. " 다른 배움도 마찬가지다. 나는 외국어 학습을 좋아하는데 예전보다 못하거나 실력이 정체된다고 느낄 때가 가끔 있다. 하지만 그것도 실력이 향상되거나 향상 직전의 신호이다. 자주 듣는 말이지만, 학습 시간과 그 효과는 항상 비례하여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래프로 말하자면, 처음에는 정비례로 올라가다가 어느 정도 가면 정체되는 기간이 나타난다. 그 기간이 지나면 다시 정비례로 향상되지만, 처음처럼 급격하게 올라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다시 정체기를 거쳐 실력이 상승된다. 그러니 정체되었거나 이전보다 실력이 떨어줬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실력이 향상되었다, 혹은 조금 더 계속하면 향상될 신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가 가장 힘들다. 연습을 해도 편화가 전혀 없다고 느낄 때가 많
고요한 마음이 필요할 때 마시는 커피 강의로 많은 말을 하고, 다수의 수강생을 만나면 잠시 고요하게 나 자신에게 머물고 싶을 때가 있다. 강사인 나에게 사치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이 간절할 때, 점심 휴게 시간을 이용해 그 사치를 누리는 곳이 있다. 회사 근처 다양한 스페셜티 원두가 있는 핸드드립 카페. 비 오는 날 잠시 회사 근처를 걷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들어갔던 카페가 지금은 종종 나만의 사치가 필요할 때 찾아가는 곳이 되었다. 그 카페의 문을 열고, 새로 들어온 원두가 있는지 메뉴보드를 확인하고 마셔보지 못한 원두가 있는지 살핀다. 유독 고요함이 필요한 오늘은 예멘 모카 마타리가 눈에 들어온다. 산미가 강하지 않고 묵직한 바디감에 초콜렛틱한 향이 특징인 예멘 모카 마타리. 예멘 모카 마타리는 세계 3대 커피 중 하나로 빈센트 반 고흐가 즐겨 마신 커피로 알려져 있다. 커피의 여왕이라 불리는 이 커피는 부드러운 신맛과 다크 초콜렛향, 묵직한 바디감, 적당히 씁쓸한 맛의 기품이 느껴지는 레드와인의 풍미까지 담고 있는 커피이다. 예멘은 아라비카 커피가 세계 최초로 경작이 된 나라이다. 아리비카 커피를 수입하고자 했던 유럽인들에게 예멘의 모카 항을 통해 예멘의
다시 일어서는 시간 난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다. 어쩌다 한 번씩 얼토당토않은 꿈을 꾸다 깨어선 황당해하는 정도라고나 할까. 하지만 오늘 새벽의 꿈은 너무 생생했고 내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잠을 깨고 나서도 한참을 복잡한 마음으로 누워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하염없이 울음을 토해냈다. 주변엔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가 있었고, 공부를 함께하는 동료들이 수십 명이 있었다. 선생님과 학생의 질문과 답변 시간이 이어졌고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지금 글을 쓸 수가 없어요.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고 흐느끼듯이. 그리고 주저리주저리 하소연하듯 뱉어내는 말은 눈물과 울음이 삼켜버린다. 그때 함께 있던 선생님과 동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꿈속이었지만 나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잠에서 깨어났다. 현실에서의 고민이 그대로 꿈속으로 옮겨졌고, 그 안에서 함께 울어주던 그들에게서 묘한 안도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말 대신에 눈물과 침묵으로 있어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엄마가 내 곁을
누구나 마주하게 될 이별의 시간 하얀 국화꽃이 가득한 길을 걷는다.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검은색으로 위아래를 단장하고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어선 고인 앞에 고개를 숙인다. 남겨진 사람. 눈물로 퉁퉁 불어버린 얼굴을 마주하고는 끝맺음을 할 수 없는 위로의 말을 건네며 그 자리를 돌아선다. 7월. 주변 사람들의 슬픔을 마주한 시간이 벌써 3번째이다. 죽음이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오랜 병환으로 생명의 시간을 예상을 했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별이라도. 죽음은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언제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순간인 듯하다. 장마로 비가 계속해서 내린 계절이지만, 비가 거치고 유달리 햇볕이 강렬했던 어느 날.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경험했다. 화장터로 향하는 죽음들이 어쩜 그리도 많은지. 한 시간 남짓 지나, 한 줌이 되어 나오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라본다. 한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살아생전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들을 자신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 자기 삶을 위해 힘썼을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든 죽음 뒤에는 모두가 똑같이 한 줌이 되어 나오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어딘지 모르게 허무함과 아쉬움이 차오른
괴물에게 먹이를 주지 마라 영화 <괴물>을 보았다. 그 안에 주인공 강두가 미지(未知)의 바이러스 보균자라고 오해를 받아 다른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장면이 있다. 이 영화는 2006년에 개봉된 작품이지만 그 장면이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있다고 느낀 사람은 나밖에 없을까? 나는 코로나 시대 초기를 떠올렸다. 미지의 바이러스를 무서워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코로나에 걸린 환자들이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라는 대응을 했다. 인간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상황을 앞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논리를 구성한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존본능이다. 모르는 일, 이질적인 일을 경계하지 않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 작품을 만든 직접적인 계기는 포름알데히드가 대량으로 한강에 흘러 들어간 사건, 동시에 더 다른 정치적인 이유도 있다고 한다. 대량의 포름알데히드가 강에 버린 것도 무서운 사실이지만 이해가 안 되는 일, 무서워하는 일에 직면했을 때 보이는 인간의 태도가 바로 괴물이 아닐까? 보통 나는 가족관계와 연애를 주제가 된 영화, 드라마를 본다. 하지만 가끔 SF, 공포 영화를 보고 소설도 읽는다. 무서울 것 같아서 한번
커피 한 잔의 가치는 그것을 마시며 나누는 대화에서 비롯된다 – 데이비드 린치 -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오고가는 말의 온도에서 나와 결이 맞는지 알 수 있다. 커피도 그러하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넣으면 나와 결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다. 산미가 있어 나와는 결이 맞지 않다고 느껴지는 커피, 쓴맛이 강해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커피. 오늘은 커피의 결을, 나에게 맞추는 레시피를 배우는 브루잉 수업이 있는 날이다. 내리쬐는 햇볕과 열기로 가득 찬 길을 가로질러 양손에 원두 박스를 들고 학원 본관 건물에서 별관으로 이동한다. 브루잉 수업에 필요한 기물들을 준비해 놓고, 에어컨의 온도를 확인하고 수강생들을 기다리며 오늘 브루잉 수업엔 어떤 원두를 사용할까 살펴본다. 박스 안에 로스팅 일자, 생산지역, 가공방식, 배전도가 적혀있는 원두 봉투들을 보니 ‘오늘은 인도네시아로 커피 여행을 떠나 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수업 시간이 되고 수강생들과 인사를 나눈 후 물줄기 연습으로 수업을 시작한다. 조용한 강의실은 드리퍼 안에 닿는 물 소리, 서버를 통해 흐르는 물소리로 작은 개울들이 생긴 듯하다. 10분쯤 지나니 “선생님, 힘들어
몇 년 동안 책을 헤어진 연인처럼 잊고 산 적이 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면 아련한 추억에 몸살을 하다가 선뜻 다시 만날 마음은 쉽게 낼 수 없는 그런 관계처럼. 한때 책이라면 밤을 새워 읽고, 월급날 서점 가는 일을 손꼽아 기다리던 사람이 내가 맞나 할 정도의 변심이다. 책을 읽는 것도 습관이고, 읽지 않는 것도 습관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는 게 힘들고 바빠 시간이 나지 않았다는 것은 핑계일 뿐인데, 너무 오랫동안 내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이유로 잘 써먹었다. 그냥 읽지 않는 게 편했을 뿐이다. 한 번 몸에 익은 편안함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게으른 자의 핑계 “내일부터는 꼭”으로 스스로 위안으로 삼았다. “책 읽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읽을 수밖에 없는 무슨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당시 문화센터에서 보드게임을 배우는 중이었는데, 선생님이 뜻밖의 제안을 한다. “선생님, 저 독서 모임 만들건대 같이 할래요?” “어머, 좋아요. 함께 해요.” “매주 토요일 아침 7시부터 시작하는데 올 수 있을까요?” “그럼요. 가야죠.” 그렇게 나는 우연히 다가온 기회를 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