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도,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도 말 한마디면 충분하지 않을까? 얼마 전 남편이 새로운 식당을 알게 된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우리는 휴일 점심을 새로 알게 된 식당에서 하기로 하고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외출 준비를 한다. 아이는 기분 좋게 준비를 먼저 끝내고 엄마, 아빠의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완벽했다. 잠시 후, 나갈 채비를 마친 남편의 그 말만 없었다면 말이다. “○○는 가기 싫어?” 어쩐지 말이 퉁명스럽다. 핸드폰에 빠져 있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걸까? “아니거든.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라고 대답하는 아이의 표정이 굳어져 간다. 나를 향한 아이의 시선은 ‘내가 뭐?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라며 억울함을 담고 있다. 현관문을 나서는 아이와 아빠의 뒷모습이 편하지 않다. 남편과 잠시 떨어져 아이에게 넌지시 물어본다. “지금 기분 물어봐도 될까?” “아빠 때문에 기분이 별로야.” “그렇구나. 아빠 어떤 말 때문에 기분이 상했을까?” “나는 가기 싫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까 싫었어.”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럼 아빠가 어떻게 말하면 좋았을까?” “준비 다 했어? 맛있는 식당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월말이면 커피 쿠폰 도착을 알리는 문자가 온다. 유일하게 참여하는 ‘매일 독서 30분’ 챌린지에서 매달 완주자에게 선물로 지급하는 것이다. 책 읽기 습관을 들여볼 생각으로 월 회비 5천 원에 자발적으로 참여를 했다. 덕분에 매일 30분이라도 거르지 않고 책을 읽는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한데, 선물까지 받으니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은 뿌듯함을 매달 느낀다. 이런 선물이라면 누구든 받고 싶지 않을까? 요즘은 감사한 마음, 축하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법이 다양하기도 하지만 가장 획기적인 건 속도가 아닐까 한다. 몇 번의 손놀림으로 어느새 누군가에게 쿠폰이라는 형태로 선물이 도착해 있는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가끔 소포 상자를 들고 우체국을 드나들던 아날로그 시대의 정성이 그리울 때가 있다. 내가 선물과 편지지를 고르는 시간을 즐기던 시절이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된 듯하다. 벌써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으려나.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 종이 신문이 보편적이던 시절. 결혼을 앞둔 지인에게 어느 해 보다 의미 있는 생일 선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지금 생각해도 엉뚱한 선물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날. 서로 다른 지역에 살다 보니, 점심 한 끼 하기도 쉽지 않은 친구와 급하게 약속이 잡혔다. 지나가는 길에 잠시 시간을 낸 것이라 만나기 바쁘게 식당으로 향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낮술을 부른다. 가볍게 막걸리 한 잔씩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얘기 중 친구가 지나가듯 하는 말이다. “그래도 우리 잘살아온 거 같지?” “그럼, 너도, 나도 잘살았지. 훌륭해!” 막걸리가 넘칠 듯 찰랑거리는 잔이 유쾌하게 부딪치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쩐지 들떠 보인다. “우리 잘살았다.”라는 한 마디가 주는 여운은 길었다. 살아온 지난 시간을 온전히 인정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살다 보면 겪게 되는 수많은 일을 “왜 내게만?”, “왜 지금?”이란 말로 부정하고 저항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살면서 현재 겪는 일들은 좋은 일과 나쁜 일로 단정 지을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가 얘기해주듯이, 지금은 나쁜 일인듯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일이 오히려 계기가 되어 새로운 기회가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삶이 내게 주는 교훈을 깨닫는 그때부터 나는 사정없이 흔들릴지라도 뿌리째 뽑히지는 않는다. 당신은 잘살았다고 말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