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동안 책을 헤어진 연인처럼 잊고 산 적이 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면 아련한 추억에 몸살을 하다가 선뜻 다시 만날 마음은 쉽게 낼 수 없는 그런 관계처럼. 한때 책이라면 밤을 새워 읽고, 월급날 서점 가는 일을 손꼽아 기다리던 사람이 내가 맞나 할 정도의 변심이다. 책을 읽는 것도 습관이고, 읽지 않는 것도 습관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는 게 힘들고 바빠 시간이 나지 않았다는 것은 핑계일 뿐인데, 너무 오랫동안 내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이유로 잘 써먹었다. 그냥 읽지 않는 게 편했을 뿐이다. 한 번 몸에 익은 편안함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게으른 자의 핑계 “내일부터는 꼭”으로 스스로 위안으로 삼았다. “책 읽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읽을 수밖에 없는 무슨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당시 문화센터에서 보드게임을 배우는 중이었는데, 선생님이 뜻밖의 제안을 한다. “선생님, 저 독서 모임 만들건대 같이 할래요?” “어머, 좋아요. 함께 해요.” “매주 토요일 아침 7시부터 시작하는데 올 수 있을까요?” “그럼요. 가야죠.” 그렇게 나는 우연히 다가온 기회를 놓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 16년을 살고 열일곱이 되던 해 이른 봄, 나는 고향을 떠났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기도 전, 아버지는 광산 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대신 생계를 책임지셨던 엄마는 바깥 활동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셨고, 나의 일반 고등학교 진학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친구들이 일반 고등학교 진학 준비로 들떠 있을 때, 나는 경북 구미의 모 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갔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공장을 다니면서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산업체 고등학교라는 제도가 있던 시절이라 가능한 이야기다. 그 시절엔 그것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얼마 후, 나는 엄마 품을 떠나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 가장 느린 기차였던 ‘비둘기호’를 타고 새로운 세계로 등 떠밀리듯 나아갔다. 내가 입사한 곳은 회사 내에 고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처지의 다른 아이들보다 환경이 좋았던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공장은 공장이었고 아직 산업현장에서 3교대 근무를 하며 공부를 한다는 것은 10대의 어린 나에겐 너무나 버거웠다. 앞으로 이것이 내 생활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엔 쉽지 않았던지 어디에도 마음
새벽의 고요를 깨던 노트북의 키보드 소리가 처음과 다르게 점점 작아지더니 기어코 손이 멈춘다.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글이 전개되고 있어서이다. 어쩌면 두 개의 글로 분리해서 쓴다면 훨씬 매끄럽고 부드러운 글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글을 나누고, 각각의 글에 살을 붙이고, 모양을 내자 꽤 괜찮은 글로 완성된다. “언제 이렇게 글을 보는 눈과 써내는 힘이 생겼지?”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무언가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어났음을 직감한다. 한동안 필요한 글만 썼던 시기가 있었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것도 이유였겠지만 언제든 내가 원하는 글 정도는 거뜬하게 쓸 수 있겠지라는 자만심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글이 주는 느낌이 전체적으로 매끄럽지 않고 거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자신은 속일 수가 없는 일이다. 글 앞에서 머뭇거리기 시작했고 글 쓰는 일이 만만하지가 않고 불편했다. 그 마음을 깨달은 날부터 나는 마음에 드는 글 한 편을 쓰기 위한 보이지 않는 일을 시작했다. 마치 도도하고 우아해 보이는 백조가 물밑에서 부지런히 발을 동동거리는 것처럼. 나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