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님은 처음부터 커피 잘 했어요?” “하트가 너무 안 나와요.” 라떼아트를 연습하던 수강생이 살짝 풀 죽은 목소리로 묻는다.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그 수강생 눈에는 내가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런 말을 하는 수강생들에게 나는 늘 “에이. 아니죠. 저도 처음엔 못했죠. 누가 처음부터 잘 하나요? 지금 ㅇㅇ님은 그때 저에 비하면 잘 하시는 거예요. 연습 더 꾸준히 하시면 돼요.”라며 위안의 말을 건넨다.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잘 하고 성장하는 것이 있을까? 주말, 산에 오르면서 눈에 들어오는 나뭇잎들, 쨍하도록 푸르른 잎을 보면 나무들이 성장하는 치열한 소리가 들리는 듯한 날이 있다. 수강생이 나에게 한 질문이 생각나 피식 웃으며 나무에게 건네 본다. “나무야, 너는 처음부터 광합성을 잘 했니?” 그러면 나무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잎을 피워내는 것도 어려운데 광합성이 쉬웠겠니?” “뿌리로 세차게 영양분을 흡수하고 온 잎을 잔뜩 펴 햇빛 받으며 광합성도 해야 하고, 해충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피토케미컬 물질을 만드는 중이야. 이렇게 나를 지켜내며 조금씩 매일 성장하고 있는 거야.” 수강생의 질문을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고 습기 가득한 여름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 바람은 물을 잔뜩 머금은 나무들의 무성한 잎사귀를 흔들고는 무심히 지나간다.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길은 최근에 새로 알게 된 산책로다. 길게 이어진 가로수 길은 그늘이 드리워져 뜨거운 햇살을 피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천천히 초록이 짙어가는 잎들에 시선을 주고, 잘 다져진 황톳길의 딱딱함이 전해지는 발바닥에 신경을 쓰며 출발하는 길. 하지만 어느새 생각은 정해진 방향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에서 시작된 생각은 너무 비싸진 시장바구니 물가에 불만을 쏟아낸다. 그러다 금방 며칠 후에 있을 친구와의 약속을 떠올린다. 나에게 “나 지금 뭐 하고 있던 거지?”라는 깨달음이 왔을 때는 이미 10여 분을 걸어온 후다. 그 10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몸은 습관적으로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 없었다. 내가 걸어온 길 사이에 있던 나무 한 그루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없다. “그게 어쨌다고? 무슨 문제 있어?” 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것”이
출근길, 현관문 앞에서 신발장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며 잠시 망설인다. 구두를 꺼내어 신을지.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설지를 나름 신중하게 고민하는 순간이다. 오늘 옷차림에는 구두가 더 어울릴 것 같지만, 두 발은 이미 바닥에 놓인 운동화를 신고 있다. ‘오늘도 걸어서 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운동화가 편하긴 하겠지.’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치마에 구두보다, 바지에 운동화를 더 즐겨 하기 시작한 것은 출퇴근길에 걷기를 시작하고부터이다. 30분 남짓의 시간을 쪼개어 걷는 것은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유일하게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처음엔 걱정스러운 마음을 덜어내기 위해 걷기 시작했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 걷다 보면 그 문제가 별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는데, 바쁘게 지내느라 크게 여유를 즐기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무엇인가 손에 쥔 것이 없는 아쉬움과 허탈함이 최근 나를 찾아왔다. 무엇을 했다면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지만, 성과라는 것은 노력한 만큼 주어지는 대가가 아니라는 것, 애쓴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음을 깨닫다 보니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일까
청소를 하지 않으면 집안 곳곳에 물건이 퍼지기 쉽다. 머릿속을 정리하지 않으면 생각의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진다. 원래 나는 호기심이 많아서, 새로운 것을 즐겨 하는 편이다. 그것에 더해 최근에 새로운 업무 제안이 들어오기에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아져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난 주 내내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생각을 연결하여 시각화로 도움을 주는 마인드맵을 주말에 만들어 보았다. 시각화 했으니 내 머릿속이 보이게 되었고, 동시에 내 생각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마인드맵의 다리를 뻗을 수 없다는 것, 요컨대 관련 단어, 사항을 계속 확장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소를 했지만 그 다음에 구체적으로 이제 어디서부터 할까 고민했던 나에게 오늘 아침에 읽은 책이 답을 줬다. 어떤 것을 하기 전에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먼저 생각하세요. 누굴 만날지 보다 누구를 만나지 않을지를 생각하세요. 그 다음에 '왜'를 '어떻게'로 바꿔보면 답이 보입니다. 강원국 작가가 쓴 책 ”강원국의 인생공부“ 중, 고명환 작가와의 대화 안에 나온 구절이다. ‘왜’ 말고 ‘어떻게’ 라는 부분을 읽었을 때 사이먼 시넥 작가가 쓴 책 “ 스타트 위드 와이 (START WITH W
“네가 이렇게 힘든 아이였어?” “너 참,어려운 아이구나." 편하게 보고 싶을 때만, 꼭 봐야 할 때만 보면 되는 너였는데, 너를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기로 마음을 먹고 공부하면서 든 생각은 너 참... 쉽지 않은 아이구나. 커피가 그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하면 바리스타는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고, 포터 필터 안에 담고, 꾹 눌러 에스프레소 머신 버튼 하나 누르면 나오는 에스프레소. 그 에스프레소를 얼음 컵에 담아 건네주면 받아서 마시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아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손님인 내 입장에서 바라보는 아메리카노는 카페에서 별생각 없이 주문하는, 만드는 것도 어려워 보이지 않는 음료였다. 주문과 동시에 빠르게 만들어져 나오는 아메리카노를 받아 카페 한 곳에 자리 잡고 들려오는 음악과 함께 즐기면 되는 편한 아이. 그런 쉽고 편한 아이를 배워 나중에 내 카페를 만들어볼까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커피를 배우기 시작했다. 커피에 대해 아는 거라곤 아메리카노, 라떼가 전부인. 커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부터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바리스타 스킬부터 배우기 시작했
서점이란 어디서나 똑같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거주자인 내가 지난 5월, 서울을 방문해 서점에 갔을 때, 일본 서점과 한국 서점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것도 처음이 아니고 한국에서 서점에 가는 것도 처음이 아닌데 왜 그동안은 깨닫지 못했을까? 이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국의 책들은 가나다라 순서로 제목 정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보는 한국인 여러분에게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일본에서는 다르다. 가나다라처럼 글자 순서로 정렬되는 것은 같지만, 제목이 아닌 작가의 이름으로 일본에서는 정렬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평소 주목하던 작가님의 책을 한국에서 직접 구입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본 습관 때문인지 작가님의 이름만 기억하였기에 책들을 찾기는 무척 힘들었다. 결국 서점 안에 있는 검색 컴퓨터를 사용해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 쓴 책 제목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서점만의 방식일 줄 알았는데, 다음 날 우연히 방문한 다른 서점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책들은 배치되고 있었다. 책을 찾기 위한 어려움은 비록 느꼈지만, 한국에서의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환경이 우리의 습관에 지배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호등 앞에 한 어르신이 리어카에 몸을 기댄 채 앉아있다. 너무나 얇은 몸에 작은 체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작은 몸집에 비해, 리어카에는 폐지와 철근들로 가득했다. ‘아침 7시가 조금 넘는 시간인데, 어디서 저렇게 많은 물건들을 모으셨는지.’ 새벽 내 리어카를 가득 채웠을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오늘은 좀 괜찮은 벌이가 되셨을까.’ 하는 짧은 궁금증이 스쳤지만, 리어카와 어리신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코끼리를 등에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느껴져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다. 빨간불이었던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변하자 어르신은 거대한 리어카를 끌고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너무 큰 무게여서인지 리어카의 바퀴는 아주 천천히 굴러간다. 그러다 툭. 하고 종이 상자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어르신은 상자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파란불이 빨간 불로 바뀔세라 걸음을 재촉한다. ‘저 종이상자 주워드려야겠다.’ 하는 순간, 등굣길인 한 고등학생이 재빠르게 주워 올리고는 묵직한 리어카를 천천히 뒤에서 민다. 스쳐 지나가기 바쁜 어른들 사이에서 먼저 나서는 학생의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우리 사회가 누군가를 도울 잠시의 시간도 할애하기 힘들만큼 빠르게 흘러감에 대한 아쉬
오후 5시, 단골 A 카페는 한산하다. 언제나처럼 라떼를 주문하고 가방에서 책이며 노트북을 꺼내는데 아뿔싸 안경이 없다. 다른 것도 아니고 눈을 두고 왔으니 어쩔 수 없이 집에 다녀와야 한다. 카페 주인에게 금방 다녀오겠다 얘기하고 걸음을 재촉해서 다녀온다. 테이블 위에는 라떼 한 잔이 이미 올려져 있다. 커피잔을 들려고 하는 순간, 카페 주인이 다가오며 말한다. “새로 만들어 드릴게요.” “괜찮아요. 제가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온 건데 신경 쓰지 마세요.” “만들고 5분만 지나도 맛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항상 옆에 두고 글 쓰시는데 제 마음이 새로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요.” “정말 감사해요. 좋은 글 쓸게요.” 생각지도 못한 카페 주인의 마음 씀씀이에 가슴엔 따뜻한 파문이 인다. 나는 다른 일이 없는 날엔, 오후 5시경이면 A 카페를 찾는다. 항상 라떼를 시키고 늘 앉는 그 자리에서 글을 쓴다. 저녁 시간이면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카페.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지도 않는다. 오히려 서로에게 방해가 안 되려는 사람들처럼 서로 조심스럽다. 그리고 8시경이면 카페 주인은 뜨거운 물 한 컵을 조용히 올려놓고 사라진다. 처음 며칠 내가 뜨거운 물을 찾았더니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해는 나의 시선과 관점이 타인을 향해 있어야만 가능한 것 같지만 실은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시선으로 바라본 후, 그 시선을 돌려 타인을 긴 시간 바라볼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한 과정이 아닌가 한다.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고 바라보기 쉽지 않으니 타인을 편견이 없이, 오해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가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 오해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내가 그 사람의 생각을, 삶을 이해할 만큼의 경험치가 부족하거나, 나의 생각의 틀 안에서 상대를 바라보고 판단하거나 평가하려고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본다. 커피가 나에겐 그러한 타인이다.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이름, 나이, 고향, 성격 등을 알고 관계를 이어가면서 생각, 가치관, 삶에 대한 태도 등도 알아가듯이 한 잔의 컵에 담긴 커피의 향미도 제대로 이해되려면 커피가 되기 전 생두, 원두부터 알아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느 나라에서 온 생두인지, 생산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로스팅은 어느 정도인지, 언제 로스팅이
6월. 아름다운 계절이다. 산책을 할 때에도 나무의 푸르름, 형형색색의 꽃들이 눈에 띈다. 자연이 빚어내는 다양한 색의 하모니에 인간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함을 느낀다. 그런 속에서 나는 나만의 사색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매일 소설의 일부를 읽고 그곳에서 생각한 내용을 자유롭게 글로 표현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있다. 문학 작품을 읽고 그 구절을 바탕으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현재 글쓰기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높다. 누구나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될까? 진주는 조개 몸속에 이물질과 조개 성분을 분비하는 외투막이 혼입되어 형성된다. 외투막이 이물질을 덮고 그것이 진주 주머니가 되어 칼슘 결정과 단백질이 번갈아 쌓여 진주층을 형성한 것이 진주가 된다고 한다. 양식의 경우 먼저 조개 안에 핵을 넣는 작업을 한다. 이는 조개에게는 대규모 수술이기 때문에 이 작업을 받은 조개는 심하게 약해진다. 따라서 한동안 양생을 시킨 후 본격적인 양식 과정이 진행된다. 그 후 진주가 자랄 때까지 3, 4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그 동안 조개를 그냥 방치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