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와 라떼 밖에 모르며, 커피를 시작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글쓰기를 시작한 나. 그런 나의 도전을 기꺼이 도와주시겠다고 손을 잡아주신 스승님이 계신다. 책 읽을 시간도 없이 하루를 사는 나에게 글쓰기는 무모한 도전이었을까? 자신감으로 채워진 글을 쓰고자 생각했던 처음 마음, 그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일상생활에 치여 점점 힘을 잃어간다. 그런 제자를 말없이 지켜보시며 힘을 내라고 선물을 보내주신 분, 그리고 칼럼니스트가 될 수 있도록 동기 부여도 해주시는 스승님.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나에게 던져주신 그분의 질문이다. 세상 살면서 쉬운 일이 뭐가 있을까? 제일 잘하는 일이 뭔가? 그 질문에 나는 커피 공부를 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커피 공부하면서 쉬운 게 뭐였을까?, 제일 잘 하는 게 뭘까?’ 여전히 쉬운 것 없고, 잘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게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는 나를 가만히 살펴본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작동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고, 컵 안에 하얀 하트를 띄우는 것도 어려웠다. 커피의 향미를 제대로 느끼고 말로 표현하는 것, 생두가 가진 향미를 로스팅으로 살려내는 것은 나에게 불가능한 일로 생각될 때도 있었다. 열기가 느껴지는 덩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 16년을 살고 열일곱이 되던 해 이른 봄, 나는 고향을 떠났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기도 전, 아버지는 광산 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대신 생계를 책임지셨던 엄마는 바깥 활동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셨고, 나의 일반 고등학교 진학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친구들이 일반 고등학교 진학 준비로 들떠 있을 때, 나는 경북 구미의 모 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갔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공장을 다니면서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산업체 고등학교라는 제도가 있던 시절이라 가능한 이야기다. 그 시절엔 그것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얼마 후, 나는 엄마 품을 떠나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 가장 느린 기차였던 ‘비둘기호’를 타고 새로운 세계로 등 떠밀리듯 나아갔다. 내가 입사한 곳은 회사 내에 고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처지의 다른 아이들보다 환경이 좋았던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공장은 공장이었고 아직 산업현장에서 3교대 근무를 하며 공부를 한다는 것은 10대의 어린 나에겐 너무나 버거웠다. 앞으로 이것이 내 생활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엔 쉽지 않았던지 어디에도 마음
눈이 시리도록 푸른, 초록빛 벼가 바람결을 따라 흔들리고 있다. 사락사락.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벼의 끝자락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더운 날씨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초록 벼가 움직이며 내는 소리에 청량감이 묻어난다. 몇 해 만에 찾은 시골 풍경은 언제나 한결같다. 자연의 모습을 통해 계절의 소식을 전하고, 도시보다는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로 차분함을 선사한다. 적어도 내가 서 있는 이곳은 그러하다. 복잡하고 부산스러운 마음이 시골집 풍경 속에 있으면 어느 순간 가라앉게 되니 말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느 봉사자가 와서 그려놓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벽마다 그려진 꽃들의 소박함에 슬며시 웃어본다. 어린 시절, 시골을 찾으면 집집마다 들러 안부를 묻곤 했는데 이제는 그 시절의 어르신들은 이곳에 없다. 점점 더 한적하게 변해가는 시골의 모습, 주인은 없지만 그대로 남겨진 집터를 보고 있자니 아쉬움이 몰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을 지키고 있는 주민들 덕분에 생기를 더해가고 있음에 어딘지 모를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올 수 있는 자연 속의 공간이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관심사가 아닐까? 글에는 내용을 전하고자 하는 자와 그 정보를 받는 자가 반드시 있고, 특히 정보성이 있는 글에 대해서는 타겟으로 되는 자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도 대상자들의 고민에 답을 주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전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내용을 나보다 정확히 표현하는 분이 쓴 글을 다시 읽어 보면 어조가 생각보다 더 조용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대화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르쳐 줄게” 라는 방식으로 상대방이 이야기한다면 듣는 사람은 쉽게 그 내용을 받아드릴까? 예를 들어 아이를 생각하는 나머지 이것저것 조언했는데 아이에게 거부당했다는 경험을 갖고 있는 부모들은 나만이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내용이 좋다고 해도 강요하는 태도라면 조언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반대로 상대방이 조언이 아니라 자기 경험담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 오히려 더 쉽게 깨달음을 얻을 경우가 많지 않을까? 강원국 작가의 조언이다. 글은 독자와의 대화이며, 말을 하고 글을 쓸 때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내용과 상대가 듣고 싶은 내용 사이에서
“강사님은 커피 매일 드시는데 괜찮으세요?” 수업하다 보면 수강생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다. 카페인에 민감해 커피를 마시면 잠 못 자는 사람, 바로 나다. 그런 내가 커피를 가르치는 일을 하니 괜찮을 리 만무하다. 특히 브루잉 수업과 센서리 수업을 하면 하루에 마시게 되는 커피의 양이 4잔 이상이 된다. 브루잉 수업에서는 수강생들이 추출한 커피 맛을 보면서 레시피 수정을 도와줘야 해서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된다. 센서리 수업은 수강생들이 느끼는 커피의 향미, 내가 느끼는 커피의 향미를 서로 조율을 해가며 객관화를 시키는 과정을 거쳐야해 다른 수업들보다 유독 커피를 많이 마신다. 그중 에스프레소 센서리를 수업하는 날은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카페인을 흡수한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그래서 그 날은 아무리 피곤해도 잠을 이루기 쉽지 않다. 수업이라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되지만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한다면 말 한마디로 카페인을 적게 섭취할 방법은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디카페인 커피를 주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더 있다. 사람들은 흔히 에스프레소에 물을 넣어 희석한 아메리카노가, 핸드드립으로 추출한 커피가 카페인이 적을 것으로 생각한다. 수업
새벽의 고요를 깨던 노트북의 키보드 소리가 처음과 다르게 점점 작아지더니 기어코 손이 멈춘다.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글이 전개되고 있어서이다. 어쩌면 두 개의 글로 분리해서 쓴다면 훨씬 매끄럽고 부드러운 글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글을 나누고, 각각의 글에 살을 붙이고, 모양을 내자 꽤 괜찮은 글로 완성된다. “언제 이렇게 글을 보는 눈과 써내는 힘이 생겼지?”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무언가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어났음을 직감한다. 한동안 필요한 글만 썼던 시기가 있었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것도 이유였겠지만 언제든 내가 원하는 글 정도는 거뜬하게 쓸 수 있겠지라는 자만심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글이 주는 느낌이 전체적으로 매끄럽지 않고 거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자신은 속일 수가 없는 일이다. 글 앞에서 머뭇거리기 시작했고 글 쓰는 일이 만만하지가 않고 불편했다. 그 마음을 깨달은 날부터 나는 마음에 드는 글 한 편을 쓰기 위한 보이지 않는 일을 시작했다. 마치 도도하고 우아해 보이는 백조가 물밑에서 부지런히 발을 동동거리는 것처럼. 나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주말이 오기 며칠 전부터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이 있다. ‘이번 주말은 오롯이 쉬어야지.’ 현대인 대부분은 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 평일에는 주어진 일정들로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잊기도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월요일에서 금요일을 맞이하곤 하는데, 시간을 잊을 만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이다. 나 역시 그러한 삶을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열심히 살아야 다음이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더 애쓰며 살게 했는지도 모른다. 쉼이라는 마침표를 주말에 몰아놓고, 평일에는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 전투력을 키운다. 긴장된 어깨는 근육통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장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보면 거북목이라는 훈장을 받기도 한다. 주말이라고 온전히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일에 함께하지 못한 가족과의 약속으로 보내다 보면, 주말도 짧게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은 평일보다는 조금의 여유를 즐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선물한다. 예정된 일정이 없었던 이번 주말만큼은 하루 종일 누워있으리라는 생각이 한주를 버티게 했다. 주말 아침, 익숙한 소리에 두 눈을 떴다. 365일 울리도록 설정해놓은 알람을 끄며, ‘아! 어제 꺼둔다는 걸 깜박했네.’ 5분
여러분들의 삶은 행복지수가 높은 삶인가요?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이 일본에서도 있다. '다른 사람의 물건과 상황은 나의 상황보다 늘 좋게 보인다'는 뜻이다. 나는 지난 5월에 매일 블로그를 쓰려고 결심했다. 아주 가끔 쓰지 못했을 때도 있었지만 거의 매일 계속 쓰고 있다. 이렇게 계속 한다면 자신의 결과에 대해 인정을 받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이면 흔한 일인 것 같다. 겨우 두 달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이상적인 결과를 바라는 것은 잘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있다. 반면 포스팅을 할 때마다 독자도, 공감 수도 많이 받는 분들이 있다. 그 분들은 블로그를 시작한지 오래된 분이고 무엇보다 글 내용이 좋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공감 수가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분들의 글을 읽으며 더 좋을 글을 쓸 수 있도록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것뿐이다. 그럴 때 이런 말이 자주 생각난다.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을 때, 그 진척도를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굳이 비교하고 싶다면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라.” 목표 달성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독려하는 말이다. 물론 공감 수를 많이 받는 것 자체는 목표가 아니다.
“강사님은 처음부터 커피 잘 했어요?” “하트가 너무 안 나와요.” 라떼아트를 연습하던 수강생이 살짝 풀 죽은 목소리로 묻는다.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그 수강생 눈에는 내가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런 말을 하는 수강생들에게 나는 늘 “에이. 아니죠. 저도 처음엔 못했죠. 누가 처음부터 잘 하나요? 지금 ㅇㅇ님은 그때 저에 비하면 잘 하시는 거예요. 연습 더 꾸준히 하시면 돼요.”라며 위안의 말을 건넨다.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잘 하고 성장하는 것이 있을까? 주말, 산에 오르면서 눈에 들어오는 나뭇잎들, 쨍하도록 푸르른 잎을 보면 나무들이 성장하는 치열한 소리가 들리는 듯한 날이 있다. 수강생이 나에게 한 질문이 생각나 피식 웃으며 나무에게 건네 본다. “나무야, 너는 처음부터 광합성을 잘 했니?” 그러면 나무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잎을 피워내는 것도 어려운데 광합성이 쉬웠겠니?” “뿌리로 세차게 영양분을 흡수하고 온 잎을 잔뜩 펴 햇빛 받으며 광합성도 해야 하고, 해충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피토케미컬 물질을 만드는 중이야. 이렇게 나를 지켜내며 조금씩 매일 성장하고 있는 거야.” 수강생의 질문을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고 습기 가득한 여름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 바람은 물을 잔뜩 머금은 나무들의 무성한 잎사귀를 흔들고는 무심히 지나간다.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길은 최근에 새로 알게 된 산책로다. 길게 이어진 가로수 길은 그늘이 드리워져 뜨거운 햇살을 피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천천히 초록이 짙어가는 잎들에 시선을 주고, 잘 다져진 황톳길의 딱딱함이 전해지는 발바닥에 신경을 쓰며 출발하는 길. 하지만 어느새 생각은 정해진 방향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에서 시작된 생각은 너무 비싸진 시장바구니 물가에 불만을 쏟아낸다. 그러다 금방 며칠 후에 있을 친구와의 약속을 떠올린다. 나에게 “나 지금 뭐 하고 있던 거지?”라는 깨달음이 왔을 때는 이미 10여 분을 걸어온 후다. 그 10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몸은 습관적으로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 없었다. 내가 걸어온 길 사이에 있던 나무 한 그루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없다. “그게 어쨌다고? 무슨 문제 있어?” 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