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면 배가 아파요 “강사님! 라이트 로스팅이 된 커피를 마시면, 배가 아플 수도 있다는데 정말이에요?” 퇴직을 앞두고 커피 공부를 시작한 그녀, 그와의 첫 만남은 커피가 아닌 카페레시피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녀 앞에서 수업한다는 것이 부담이었던 첫 기억, 하지만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 걱정을 서서히 불식시키고 있었다. 배우는 것을 즐기고,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며,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열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커피와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 카톡으로 물어 오는 그녀의 질문에 TV로 향했던 나의 시선을 옮겨 질문을 다시 읽어본다. 라떼를 마시고 배가 아팠다는 경험은 수강생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었지만, 라이트 로스팅 된 커피를 마시면 배가 아플 수 있는지 묻는 건 처음이다. ‘라이트 로스팅된 커피를 마시면 배가 아프다?’ ‘로스팅으로 생성되는 화학 성분들과 복통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나에게 속으로 질문해본다. 라떼를 마시면 배가 아픈 이유는 우유에 있는 유당과 관련이 있다. 사람에 따라 락타아제라는 효소가 부족할 경우, 제대로 분해가 되지 않은 유당이 대장에서 발
공간을 채우는 에스프레소 한 잔 비어있는 강의실에 들어간다. 에스프레소 머신 워머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빈 잔에 눈이 머문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강의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하얀 잔. 워머 위, 컵을 바라본다. 매끄러운 도자기 감촉과 함께 텅 비어있는 컵 안이 눈에 들어온다. 빈 잔을 보니 설 연휴 마지막 날의 아침이 떠오른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혼자 눈을 뜨고, 마주한 시공간, 해야 할 일이 많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 날이었다. 무엇을 할까 망설이다 이어폰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며칠 전부터 내린 눈 위로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인다. 허전해 보이던 눈길이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채워지고, 그 발자국 위로 내 발자국을 더한다.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빠른 음악에 맞춰 걷다 문득, 나무 아래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발걸음을 나무로 옮긴 후, 웅크리고 앉아 눈을 자세히 바라본다. 멀리에서 보면 공간 없이 꽉 찬듯했지만, 자세히 바라보니 듬성듬성 눈 사이 공간투성이다. 크기도 조금씩 다르다. 작은 눈들이 쌓여있는 입도를 보니 꼭 에스프레소용 원두가루를 바라보는 듯하다. 원두가루 입도(Particle Size Distribu
겨울이면 생각나는 사람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이 짙어질 무렵이면,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단발머리에 다리를 절뚝거려, 걸을 때마다 온몸이 기우뚱 거리는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몽실언니’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권정생 작가의 몽실언니는 어둡고 혼란스러웠던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 속 세부 내용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겨울이 되면 그녀가 생각나는 이유는 차가운 환경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하는 겨울이 그녀와 닳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삶은 여러 면에서 기구하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둘이다. 가난한 떠돌이 아버지와 몽실의 다리를 절름발이로 만든 새아버지 김주사, 어머니 밀양댁과 여동생 난남이를 낳다 세상을 떠난 새어머니 북촌댁이 있었다. 그리고 배다른 동생과, 아버지가 다른 동생까지, 그녀는 책임져야 할 동생도 많았다. 전쟁의 그늘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갔던 그녀의 삶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도 그녀가 살아낸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현재도 전쟁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으며, 그 속에서 가족을 잃거나 고향을 떠나야 하는 난민이 생겨나고
우연이 아니라 갈망이며 필연이다 “당시 나는 독특한 피난처를 찾아냈다. 흔히 말하듯이 ‘우연’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우연’이란 없다. 누가 무언가를 꼭 필요로 하는데 제게 꼭 필요한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우연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갈망과 필연성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것이다.”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며칠 동안 이어졌던 책 읽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글귀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가슴 깊은 곳에서 기쁨과 후련함이 파도치듯 밀려오고 나는 그 느낌을 즐겨본다. 헤르만 헤세의 문장들은 책 곳곳에서 나를 흔들고 깨우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글귀는 저것이었나 보다. 처음부터 <데미안>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어쩌다 시작된 독서 계획 자체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나는 며칠째 풀리지 않는 숙제 앞에서 조급증을 내고 있었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책을 뒤적인 것이 그 시작이다. 이 책 어딘가 내 답답한 가슴에 숨구멍을 내어줄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완전한 답이 아니라 실마리가 되어줄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는 희망으로 말이다. 부드러운 겨울 햇살에 고스란히 드러난 책꽂이는,
갑진년 값진 한 해가 벌써 지나가고 을사년 새해를 맞은 지도 벌써 일주일이지났지만 곧 구정이 다가오기 때문에 이 인사의 글을 올려도 늦지는 않아 현직에서 학생들에게 신년사로 한 번씩 했던 “근하신년”을 내 방식대로 풀이해 보고자 한다. 새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희망찬 한해의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고 멋진 한 해, 새로운 나로 태어나 보겠다고 굳은 약속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이루지 못한 과거의 습관 때문에 새해 결심을 하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다. 아일랜드의 시인,소설가,극작가인 오스카 외일드는 ‘“새해 결심의 결과는 결국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고, 어떤 성과(成果)심리학 전문가는 ’새해 결심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루지 못한 이유에 대해 “ 자신을 점검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새해가 되면 연하장을 주고 받는데 ‘근하신년’이란 말을 가장 많이 쓴다. 사전적 의미는 “삼가 새해를 축하 한다”는 뜻이지만, 그 네 글자를 나의 억지 방식으로 풀이해 보면 참 좋은 덕담이 된다. 첫째 근(謹)은 삼갈 근으로 言 +(근)의 합성으로 말을 삼가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옛날 우리 성현들은 스스로 말을 조심하고 경계하며 삼가는 말
실버스킨 속 당신의 모습 껍질, 살면서 역할이란 울타리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였던 시간이 있었을까? 내가 알고 있는 나, 그 껍질을 벗기고 나면 비로소 온전한 나를 만나게 되는 걸까? 일, 삶의 목표와 같이 밖으로만 향해야 했던 시선들은 자주 ‘나’를 잊게 만든다. 문득 외롭다는 느낌이 찾아온 휴일 아침, 감정이 남겨 준 공간 사이로 ‘나’라는 존재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본다. “때가 왔어. 지금이 온전히 널 만날 시간이야. 외로움이라는 빈 공간을 통해 나 자신을 마주할 시간, 그 공간에서 껍질 속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까?” 큰 창문을 통해 보이는 회색빛 하늘, 잎 하나 없이 껍질만 남은 듯 보이는 앙상한 겨울나무,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인 그늘진 땅. 여전히 창밖으로 향해있는 시선을 뒤로하고 잠시 눈을 감는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창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내쉬는 숨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내려 본다. 검은 커피 위에 얼굴이 비친다. 나는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분주했던 마음, 복잡했던 감정도 잔잔한 검은 커피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고요해지고 차분해진다. 커피 위에 비친 나를 바라보는 지금, 모든 것이 잠시 멈춘 듯하다
원두의 호흡 소리 휴일 오후, 글이 안겨주는 평온 속에서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 “카톡”. 평온함을 깨는 소리, 책에 고정되어 있었던 눈은 자연스레 휴대폰을 향한다. 업무 내용과 함께 전달된 파일. 반나절이나 남아있던 휴일의 여유와 평온함은 카톡 알림 소리로 마침표가 찍어진다. 내용을 보니 담당자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보내온 업무이다. 기분이 얹잖아 진다. 이러한 감정들은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게 만들며 점차 불편한 감정까지 만든다. 평온했던 마음에 금이 가고 화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려 한다. 천천히 호흡한다. 들이쉬고, 후우 내쉬고, 들이쉬고, 후우 내쉬고, 그렇게 호흡을 반복하며 내쉬는 숨을 따라 화가 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화라는 감정을 말없이 바라본다. “화가 나는구나. 쉬는 날 방해받아 불쾌했구나. 그 기분이 과거의 불쾌했던 일까지 떠오르게 만들어 화나는구나. 화가 날만 하는구나.” 화가 나는 감정을 인정하고 들여다보니 내 마음 그릇의 크기가 보이는 듯하다. 담을 수 있는 감정의 양, 소화할 수 있는 감정의 크기가 꽉 차 여유가 없음도 느껴진다. 마음의 그릇이 꽉 차 더 담지 못하고 금이 가고 새어 나오는 감정 화. 그러한 화가 말로, 행
생(生)이 여행이 될 수 있기를 지금도 잊히지 않는 한 마디가 있다. “할매는 이제 새로운 여행을 하러 가는 거잖아.” 엄마가 떠나던 날,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이가 한 말이다. 아이의 그 말은 황망한 상황에서도 내 가슴에 새겨졌던 것일까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상념에 잠길 때면 어김없이 되살아난다. 중학교 1학년인 아이는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늘나라에서 이제 편안하실 거라는 말도 아니고 여행을 한다니, 그냥 무심코 던진 말이었을까? 난 아이에게 삶은 여행이고 죽음은 다른 생을 위한 여정일 뿐이라는 비슷한 얘기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날 이후, 내 생에서 가장 가깝고 사랑했던 사람, 엄마를 떠나보내고 과연 죽음은 무엇인가를 자주 생각했다. 왜 그렇게 가슴이 찢기는 것같이 아프고 슬픈지?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상실감으로 다가왔던 건지를. 살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본 적이 있지 않았을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 현생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에 태어나는 윤회(輪廻)는 있는가? 그도 아니면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면 영혼까지도 사라지는 것인가를
새해, 나의 세 번째 커피는 올해의 목표와 소망을 가슴에 품고, 새로운 마음으로 향하는 첫 출근길 떡국과 함께 한 살 더 먹는 나이가 마냥 좋았던 어릴 적과는 달리,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름이 없는데 하루 사이에 한 살을 더 먹게 되는 것에 살짝 억울한 마음이 드는 출근길이다. 새해가 되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출근길 커피 한 잔, 점심시간 동료들과 마시는 커피가 아닐까? 뜨거운 커피를 손에 쥐고, 컵에 입술을 살짝 댄다. 아직 이불 속에 있는 듯한 머리를 카페인이 깨워주길 바라며 주문을 외우듯 호호 불어 본다. 입안에 들어온 따스한 아메리카노의 온기는 멍했던 머리를 깨운다. 반쯤 감긴 눈을 뜨게 한다. 온몸에 퍼지는 커피의 따스한 기운이 시렸던 몸과 마음을 녹이는 듯하다.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새해의 결심, 카페인 덕에 머릿속에 각인되듯 또렷해진다. 올 한 해, 아침잠을 깨우고 차가운 몸과 마음을 녹여준 커피처럼 나와 인연이 닿은 이들에게 작년보다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하고자 다짐하며 새해 첫 수업을 시작한다. 수강생들과 새해 인사와 덕담을 나누고 시작하는 수업, 오늘은 핸드드립 대신 라떼를 나누어 볼까 싶어 물어본다. “새해 첫 커피
커피 맛이 왜 매번 다를까요? 수강생이 묻는다. “강사님! 제가 자주 가는 집 앞 카페가 있는데요. 갈 때마다 커피 맛이 달라요. 왜 그런 거예요?” 수강생의 질문에 잠시 수강생을 바라본다. 그리고 되묻는다. “같은 메뉴를 주문하는데 맛이 다른가요? “네, 똑같은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하는데 갈 때마다 맛이 달라요.” “같은 원두를 핸드드립으로 주문하는데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거죠?” “네” 어떻게 대답을 할까 잠시 고민한다.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커피를 잘 알고, 일관된 맛으로 추출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면 핸드드립으로 추출된 커피의 맛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핸드드립으로 추출되는 커피의 맛이 갈 때마다 다르다면 그 이유를 몇 가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생두의 종류가 바뀌거나 품질이 다를 경우 그러할 수 있다. 생두의 종류가 바뀌면 원재료가 바뀌는 것이니 당연히 향미가 다를 수밖에 없고, 같은 종류의 생두라도 품질을 달리하면 커피의 맛에 영향을 준다. 두 번째 이유는 동일한 종류, 품질의 생두라도 로스팅이 균일하지 않을 경우이다. 커피의 향미는 로스팅 과정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기에 로스팅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프로파일을 작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