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크게 의미가 있지가 않아요. 이대로 죽어도 그냥 뭐. 괜찮을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중년의 한 남성을 마주하고 있다.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아내는 암 선고를 받고 누워 있다고 했다. “앞으로 즐기면서 살기로 했는데. 날벼락 같은 일이었어요.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아내를 보자니 인생이 허무하게만 느껴지는군요.” 지인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들른 병실 로비에서 눈빛에 초점을 잃은 채 이야기를 하는 이름 모를 어르신에게 그렇다 할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집으로 오는 동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내의 병환 앞에 허무함을 읊어대는 남성을 보고 있자니, 저 마음은 어떠할까 생각하게 된다. 함께 하자 약속했던 것들을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삶의 시계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더 낫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언어는 어쩌면 반어적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삶의 무의미에 대해 고민했던 쇼펜하우어도 이런 말을 했다. “죽도록 잘 살고 싶어서,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그리고 “누구나 내일이 오지 않길. 한 번 이상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초록빛 벼가 바람결을 따라 흔들리고 있다. 사락사락.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벼의 끝자락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더운 날씨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초록 벼가 움직이며 내는 소리에 청량감이 묻어난다. 몇 해 만에 찾은 시골 풍경은 언제나 한결같다. 자연의 모습을 통해 계절의 소식을 전하고, 도시보다는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로 차분함을 선사한다. 적어도 내가 서 있는 이곳은 그러하다. 복잡하고 부산스러운 마음이 시골집 풍경 속에 있으면 어느 순간 가라앉게 되니 말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느 봉사자가 와서 그려놓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벽마다 그려진 꽃들의 소박함에 슬며시 웃어본다. 어린 시절, 시골을 찾으면 집집마다 들러 안부를 묻곤 했는데 이제는 그 시절의 어르신들은 이곳에 없다. 점점 더 한적하게 변해가는 시골의 모습, 주인은 없지만 그대로 남겨진 집터를 보고 있자니 아쉬움이 몰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을 지키고 있는 주민들 덕분에 생기를 더해가고 있음에 어딘지 모를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올 수 있는 자연 속의 공간이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주말이 오기 며칠 전부터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이 있다. ‘이번 주말은 오롯이 쉬어야지.’ 현대인 대부분은 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 평일에는 주어진 일정들로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잊기도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월요일에서 금요일을 맞이하곤 하는데, 시간을 잊을 만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이다. 나 역시 그러한 삶을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열심히 살아야 다음이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더 애쓰며 살게 했는지도 모른다. 쉼이라는 마침표를 주말에 몰아놓고, 평일에는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 전투력을 키운다. 긴장된 어깨는 근육통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장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보면 거북목이라는 훈장을 받기도 한다. 주말이라고 온전히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일에 함께하지 못한 가족과의 약속으로 보내다 보면, 주말도 짧게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은 평일보다는 조금의 여유를 즐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선물한다. 예정된 일정이 없었던 이번 주말만큼은 하루 종일 누워있으리라는 생각이 한주를 버티게 했다. 주말 아침, 익숙한 소리에 두 눈을 떴다. 365일 울리도록 설정해놓은 알람을 끄며, ‘아! 어제 꺼둔다는 걸 깜박했네.’ 5분
출근길, 현관문 앞에서 신발장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며 잠시 망설인다. 구두를 꺼내어 신을지.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설지를 나름 신중하게 고민하는 순간이다. 오늘 옷차림에는 구두가 더 어울릴 것 같지만, 두 발은 이미 바닥에 놓인 운동화를 신고 있다. ‘오늘도 걸어서 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운동화가 편하긴 하겠지.’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치마에 구두보다, 바지에 운동화를 더 즐겨 하기 시작한 것은 출퇴근길에 걷기를 시작하고부터이다. 30분 남짓의 시간을 쪼개어 걷는 것은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유일하게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처음엔 걱정스러운 마음을 덜어내기 위해 걷기 시작했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 걷다 보면 그 문제가 별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는데, 바쁘게 지내느라 크게 여유를 즐기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무엇인가 손에 쥔 것이 없는 아쉬움과 허탈함이 최근 나를 찾아왔다. 무엇을 했다면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지만, 성과라는 것은 노력한 만큼 주어지는 대가가 아니라는 것, 애쓴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음을 깨닫다 보니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일까
신호등 앞에 한 어르신이 리어카에 몸을 기댄 채 앉아있다. 너무나 얇은 몸에 작은 체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작은 몸집에 비해, 리어카에는 폐지와 철근들로 가득했다. ‘아침 7시가 조금 넘는 시간인데, 어디서 저렇게 많은 물건들을 모으셨는지.’ 새벽 내 리어카를 가득 채웠을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오늘은 좀 괜찮은 벌이가 되셨을까.’ 하는 짧은 궁금증이 스쳤지만, 리어카와 어리신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코끼리를 등에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느껴져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다. 빨간불이었던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변하자 어르신은 거대한 리어카를 끌고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너무 큰 무게여서인지 리어카의 바퀴는 아주 천천히 굴러간다. 그러다 툭. 하고 종이 상자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어르신은 상자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파란불이 빨간 불로 바뀔세라 걸음을 재촉한다. ‘저 종이상자 주워드려야겠다.’ 하는 순간, 등굣길인 한 고등학생이 재빠르게 주워 올리고는 묵직한 리어카를 천천히 뒤에서 민다. 스쳐 지나가기 바쁜 어른들 사이에서 먼저 나서는 학생의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우리 사회가 누군가를 도울 잠시의 시간도 할애하기 힘들만큼 빠르게 흘러감에 대한 아쉬
며칠 전, 한 장의 명함을 받았다. 우연히 받은 명함에 독특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향기였다. 코끝을 살포시 스치는 라일락 꽃향기가 명함 끝자락에서 느껴졌다. 그 덕분에 어딘지 모르게 안정감이 찾아왔다. “명함에서 좋은 향이 나는데요.” “아. 제가 아침에 실수로 가방에 향수를 쏟았는데 그 향이 명함에도 스며든 것 같아요.” 실수로 쏟은 향수 때문에 명함에서 향기가 나는 상황이 되었지만, 명함의 향으로 이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루에도 수십 장의 명함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은 기억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명함을 보고도 상대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전해 받은 명함에서 좋은 향이 난다면, 그 대상을 좀 더 기분 좋게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심리학 용어 중에 각인 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동물학자 로렌츠에 의해 유명해진 개념인데, 새끼 오리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나온 것이다. 새끼 오리들이 한 남성을 종종거리며 따라가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실험의 대표적인 결과이다. 로렌츠는 인공부화기에서 부화시킨 새끼 오리들이 태어난 순간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을 마치 어미 오리처럼 따라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걸요.” 오늘도 어깨를 축 늘어뜨린 한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아 무엇인가 시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 현실의 벽이란 경력, 학력 등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들로 인하여 원하는 분야로 진입이 어렵다는. 그래서 마음이 힘들다는 것이다. 가끔 자신의 환경과 한계를 이야기하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답답한 마음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한 곤충학자가 벼룩의 점프력을 확인하는 재미난 실험을 했다. 일반적으로 벼룩은 자기 몸의 100배가 넘는 높이로 뛰어오를 수 있다고 한다. 30cm 정도 높게 뛰어오를 수 있는데 사람으로 따지면 고층 빌딩 높이까지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 이런 벼룩을 15cm 투명한 유리병에 넣고 덮개를 덮으면, ‘탁탁’ 소리가 들린다. 벼룩이 뛰어오르며 덮개에 부딪히며 소리를 내는 것이다. 얼마 뒤, 그 소리는 멈추게 되는데 이때 학자는 신기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30cm까지 뛰어오를 수 있는 벼룩이 덮개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15cm 높이로 일정하게 뛰는 것이다. 잠시 뒤 덮개를 제거했음에도 불